신은미씨의 참담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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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시사인>의 전혜원 기자가 쓴 기사에 영감을 받아 신은미씨 사건을 좀 다른 관점에서 풀어본 기사입니다:
http://www.nknews.org/2015/01/the-disturbing-case-of-shin-eun-mi/

기사를 쓰면서 마지막으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인 후지이 다케시 선생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한겨레>에 연재하시는 칼럼들 못지 않게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미 잡아놓은 기사의 구도가 있기 때문에 모든 언급을 다 기사에 인용할 수가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대신 이 블로그에 전화로 나눈 이야기의 개략적인 내용을 올려둡니다. 대화의 맥락이 모두 반영된 것은 아니라서 조금 이해가 어려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국가 폭력이 청산되거나 심판받은 적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파 측에서 옹호하는 논리는 남한이 전쟁 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일정 부분 정확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한국은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전쟁 상황은 내란을 포함하는 것이고,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국가폭력이 자행될 때는 민간인을 포함해서 (국민들을) 함부로 죽였다. 이를 청산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 당시 과거사 위원회가 활동했지만 흐지부지 되었고,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이러한 부분(과거사)은 건드리지 못했다. (국가폭력에 대한 비판은) 이제까지 덮여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폭력에 대한 옹호는) 이제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뿐이다. (국가폭력에 대한 옹호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서 이제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었다고 생각한다. (…)

쌓여있던 폭력은 처벌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국가)폭력은 어느 정도 용인 되었기에 이를 단순히 나쁘다고 규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함께 풀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북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북한이 좋은 지 남한이 좋은 지에 대한 (이분법적인 접근이다). 이러한 적대성을 풀어나가려는 과정이 필요하다. 김대중 노무현 때 시도되었던 것이 이것이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한계 역시 누가 나쁘다, 누군가를 배제하자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갔던 것이다. 이것이 (일시적으로) 보수층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힘이 약해지면서 이 사람들(보수층)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들과) 대화를 해야 하지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를 설정해야 하는 문제는 남아있다. 대화를 하려고 해도 공통된 언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대화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냥 이야기 하겠다는 것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일단은 이 사태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의 ‘일부’가 이상하다고 접근하는 방식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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