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꿈은 그냥 돼지가 나오는 꿈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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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나는 꿈을 꾸는 일이 별로 없다. 아니, 꾼 꿈을 기억하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테다. 사람은 얕은 잠쯤에서 몇 개의 꿈을 꾸고 깊은 잠으로 빠져들면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들 하니.

돼지박물관을 간 이후로 나의 미니피그 사랑은 점점 깊어갔고 페이스북에서 여러 개의 미니피그 관련 페이지를 구독하면서 거의 매일같이 미니피그 사진들을 보기 때문이었을까, 월요일에 나는 드디어 꿈에서 미니피그를 만났다. 그것도 두 마리나.

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사거리에서 이상하게 차가 정체되는 것이, 차창 너머로 보니 어린 미니피그 두 마리가 찻길을 위험하게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달려가 둘을 안아들었다.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았을 경우 잘 도망다니는 걸 아니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얌전했다.

집으로 데려오고 나서도 걱정이 많았다. 나는 미국 미니피그 협회에서 미니피그 가이드북도 구매한 사람이라 전형적인 한국의 주거 환경에서 미니피그를 키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이 새끼돼지들이 잘 살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잠깐 두고보니 둘이 포개어서 새근새근 잘 자고 있어 다소 안심이 됐다.

내 생애 첫 돼지꿈이었다.

나는 한번도 복권 따위를 사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무슨 대단한 철학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희박한 확률에 푼돈을 거는 게 무의미해 보여서 하지를 않았고 그러다보니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번도 복권 따위를 사지 않은, 꽤 희귀한 사람이 됐다. 그것을 알고 나서는 일종의 철학처럼 여겼다.

어쩌면 인생에는 각각에게 주어진 운이라는 게 있는 것이고, 그것을 이런 일에 무의미하게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것.

물론 나중에 주워섬긴 철학이기 때문에 생애 처음으로 만난 돼지꿈 앞에서까지 붙들고 있을 이유란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집 왕여사는 같은날 내게 자신의 동생이 자신의 꿈을 꾸었다며 로또를 사라 했다고 말했다. 처제는 ‘신끼’가 있어서 예지몽을 잘 꾼다 했다.

돼지와 예지몽. 게다가 돼지는 예쁜 새끼 미니피그인데다가 두 마리였다. 이것은 된다. 우리는 동네 편의점에서 로또를 하나씩 샀다. 1등과 2등이 한번씩 나왔던 집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1등 28억. 나는 돼지가 두 마리니까 줄잡아 50억일 터였다.

친구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는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똥을 먹었어 똥을. 솔직히 나는 똥 먹는 꿈이 그렇게 좋은 꿈이라고들 한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한민족은 스카톨로지의 민족이었던가. 그는 로또를 사고는 한참을 고민했단다. 이건 틀림없이 되는 각인데. 되면 무엇을 해야하나. 남자친구와 절연하고 가족과 절연하고 멀리 도망갈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며, 그는 얼마 후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저는 준비가 안되었어요 그냥 저를 당첨시키지 말아주세요, 라고 빌었다 한다.

물론 로또가 그때 됐으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도 않았으리라.

나는 일소에 부쳤다.

나에게 돈 쓸 계획은 충분하다. 무엇을 하든 집을 짓고 1층은 미니피그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든 다음, 나를 도와주신 은혜를 갚기 위해 미니피그 두 분을 모실 것이었다. 그후에는 러시아 극동연방대학교에 가서 한 1년 정도 러시아어를 배워도 좋겠지.

그리고 도깨비 마지막 연속방영을 보다가 로또 추첨이 끝났겠다는 생각이 들어 번호를 확인해봤다. 가장 작은 번호가 20번대인 것을 보자마자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 1만원, 왕여사 1만원. 총 20개의 수열에서 단 하나만이 5천원에 당첨됐다. 그나마 그 5천원은 내가 산 로또에서 당첨됐으니 처제의 예지력보다는 미니피그 두 마리의 힘이 더 강력하다는 게 입증된 셈. 왕여사는 꿈이나 로또 샀단 이야기를 하면 부정탄다는 생각에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데 역시 그 또한 안 맞기란 매한가지였던 게다.

그리하여 돼지꿈은, 그냥 돼지가 나오는 꿈일 뿐인 것으로. 혹시 누군가 돼지가 싼 똥을 먹는 꿈을 꾼다면 조금은 상황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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