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파라이소: 한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망한 칠레의 항구 도시 ②

쓰레기와 오물이 나뒹구는 거리와 허름한 집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 그 모습이 신기한 듯 카메라를 꺼내어 연신 사진을 찍는 부유한 나라의 관광객들.

어니는 그런 “소셜 트립(그런데 이 표현이 이런 의미로 통용되는 것 같지는 않다)”을 혐오했다. 미국인과 유럽인들이 길바닥에 놓인 개똥도 사진을 찍는 모습을 흉내내며 비웃었다. 무언가를 정말로 증오/경멸해본 사람은 그가 흉내내는 모습에서 그런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비단 남미까지 와야만 이런 것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요즘은 서울의 쪽방촌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심지어 ‘도둑맞은 가난’은 1975년작 아니던가.

(타인에겐 엄혹한 가난일 수 있는 허름함을 감상적으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나도 무고할 리 없다.)

이건 그냥 관광객용 발포에 불과하다면서 어니는 우리를 ‘발포 레알’로 이끌었다. 관광객들이 자주 오가는 거리에서 보다 내륙쪽으로 들어가면 펼쳐진다.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들어가면 (마치 포르노에 대한 그 유명한 정의처럼) 금방 알 수 있다. 도로의 포장 상태도 달라지고 무엇보다도 관광객이 안 보인다.

아마 서구에서 온 관광객이 여기 들어서면 홀랑 털려서 나올 걸. 나를 겁주려고 하는 말인지 반신반의하면서 어니를 따라갔다.

무엇보다도 무너진 상태로 방치된 건물들이 너무 많이 보여 놀랐다. 어니의 설명에 따르면 지진이 나서 무너진 후에 복구를 안한 경우가 대부분이란다.

그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외벽만 뼈다귀처럼 남아버린 한 건물이었다.

어니에 따르면 몇년 전에 가스폭발 사고로 4명이 사망하고 건물이 거의 다 무너졌는데 외벽만 더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고 내버려뒀다 한다. 무슨 영화 세트를 보는 듯했다.

나는 여행에서 모든 사진을 내 구글 픽셀 스마트폰으로 찍었는데 내가 스마트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본 내 친구가 주의를 줬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강도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게다. 물론 뉴욕에서 거금을 주고 산 나의 소중한 픽셀을 소매치기에게 헌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의 무슨 몰카 찍듯이 주머니에서 슬쩍슬쩍 꺼내어 찍느라 좋은 구도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기왕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어 KIM이라고 싸인을 했다… 뻥입니다. 저는 이런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도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경치는 점차 좋아진다.

어니는 더 안쪽으로 들어가보겠느냐고 물었지만 정말 뭔일 당할지도 몰라 무서워서 그냥 언덕이나 계속 올라가자고 했다.

이 언덕의 꼭대기에는 해군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이 문을 닫는 6시가 가까웠는데 그래서인지 직원이 그냥 무료로 들어가게 해줬다. 그래도 밸파라이소의 인심은 따뜻했다.

구경을 끝내고 나오는데 독특한 물체가 눈에 띄었다. 2010년 칠레에서 발생했던 광부 매몰 사건 때 이들을 구조하는 데 쓴 장비였단다. 이게 왜 여기 있을까 했는데 알고보니 이 장비가 해군 장비라고.

세바스찬이 탑승한 모습. 나도 타서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비냐 델 마르의 버스 터미널로 돌아와서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어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니는 근자에 아옌데와 피노체트에 대한 책을 공저했다 한다. 최대한 역사적 사실들에 입각하여 아옌데와 피노체트에 대해서 냉정하게 평가하고자 했다 한다.

여행 전에 인터넷에서 칠레에 대해 검색하여 읽은 내용 중에는 아직도 민감한 내용이니 아옌데와 피노체트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현지인들과 하지 말라는 게 있었다. 피노체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많다고. 오늘날 칠레에서 아옌데와 피노체트를 보는 시각에 대해서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무작정 사회주의자들을 찬양하던 구닥다리 좌파들의 시각에 오염돼 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를 찬양하던 바로 그 동일한 무리들의.) 피노체트에 대해 칠레 인민들이 갖는 이미지는 한국의 박정희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좌파 사학자들은 항상 신화를 만드려 하고, 우파 사학자들은 제대로 연구를 안한다. 어니가 책 이야기를 하다 내게 한 말이다. 나에게는 거기에 응수할 만한 식견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역사는 복잡한 것이고 항상 너무 쉽게 모든 걸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고만 말했다.

분명 흥미로운 책일 듯한데 문제는 스페인어…라는 것.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스페인어가 느는 것과 이 책의 영어판이 나오는 것 중 아무래도 (그리고 슬프게도) 후자가 더 빠를 것 같긴 하지만, 꼭 읽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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