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륭을 기리며

어떤 우연은, 시간과 공간이라느니 원인과 결과라느니 하는 사바세계의 성가신 관료제를 ‘의미’라는 이름의 전차로 단박에 돌파해 버린다. 융의 공시성synchronicity 같은 것이다. 물론 20세기의 끝자락에 태어나 21세기를 사는 나는 이것이 의미를 통해 무질서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찾으려고 하는 심약한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고 의심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정말 의미는 그렇게나 무의미한 것일까. 어쩌면, 적어도, 마법에 대한 비교적 근래의 (수정주의적?) 이론이 추구하듯, 의미를 …

라이바흐: 북한에서 공연한 최초의 록 밴드가 남한에 오다

라이바흐가 2015년 평양 공연 일정을 발표하면서 북한에서 공연한 최초의 록 밴드가 됐을 때 (나를 비롯한) 팬들은 그 절묘함에 쾌재를 불렀다. 세계 최고의 전체주의 국가, 북한만큼 라이바흐가 공연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또 어디 있을까. 슬라보예 지젝도 같은 생각이었다:  대체 라이바흐가 어떤 밴드이길래 지젝이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걸까? 라이바흐가 평양 공연을 마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리버레이션 데이’를 보면 가늠할 수 있다.  ‘리버레이션 데이’는 …

콜린 윌슨을 되새기며

이응준 작가가 몇년 전엔가, 인터뷰 자리에서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챙겨온 것을 기사에서 본 기억이 있다. 조선땅에 처음으로 ‘아웃사이더’가 소개됐을 때의 파문은 상당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 시절의 문학청년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예전에 그러했던 형님들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건대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어떻게 하여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내가 한참 학업을 계속해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

산티아고 커피 순례길

미안해요, 그 산티아고가 아니라서. 칠레는 물론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여느 남미 국가와 마찬가지로 커피 또한 훌륭합니다. 혹시 칠레 산티아고를 찾을 커피애호가들을 위해 한가지 유용한 정보를 남깁니다. 산티아고에서 평이 좋은 카페들을 여럿 찾아다녔는데 한 카페의 주인들이 영어를 상당히 잘하길래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서울에서 열리는 카페쇼에 참가할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산티아고에서 좋은 카페들을 찾아다닌다고 하니까 이런 웹사이트를 소개해줬습니다: http://santiagocoffeelovers.cl/ 산티아고의 커피 애호가들이 …

존 그레이 –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 ―도덕경 5장 책의 원제인 Straw Dogs는 도덕경의 저 유명한 구절을 따온 것이라 한다. 도덕경에는 각기 다른 시대에 엮어진 세 개의 유명한 판본(곽점, 백서, 왕필본)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그리고 가장 최근에 발견된) 곽점본의 5장에는 저러한 구절이 없다. 하여, 유교의 핵심 덕목인 仁에 바로 내리꽂는 이 구절은 당시에 유가와 경쟁하던 도가 사상가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