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살기 좋아졌다는데 왜 시간은 자꾸 부족한 걸까

[note note_color=”#f3f3f3″]세상은 살기 좋아졌다는데 왜 우린 자꾸 시간에 쫓기는 걸까? Elizabeth Kolbert가 New Yorker에 쓴 No Time을 짧게 옮겼습니다.[/note]

1928년 겨울, 경제학계의 거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짧은 에세이를 썼다. 케인즈는 2028년쯤이 되면 유럽과 미국에서의 삶의 질은 매우 높아져서 아무도 돈 버는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우리 손자뻘 되는 사람들은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해도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게 케인즈의 표현이었다.

케인즈는 다가오는 풍요의 시대는 환영할 만한 것임과 동시에 하나의 도전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노동을 할 필요가 적어지면 그만큼 생겨나는 여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케인즈가 언급했던 2028년이 14년 남은 오늘날, 그의 예견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빗나갔다. 미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16배, 1인당 GDP는 6배가 증가했다. 세계 경제가 전반적으로 미국와 유사한 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의 증대가 여가의 증대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시간에 쫓기면서 살고 있는 듯하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브리짓 슐트는 최근 발간한 자신의 저서 Overwheled: Work, Love, and Play When No One Has the Time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었다. 저서에서 슐트는 왜 시간의 압박이 늘기만 하고 결코 줄지 않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들을 다룬다.

슐트가 초반에 다루는 이론 하나는 바쁘다는 것이 사회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는 설명이다. 바쁜만큼 그 사람은 더 중요하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바빠지기 위해, 혹은 적어도 더 바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경쟁한다는 것이다. 노스다코타 대학의 한 연구자는 지난 50여 년간의 연하장들을 수집하여 분석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연하장의 내용들이 새해에 대한 축복 인사보다는 지난해가 얼마나 바빴는지에 치중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 최근의 한 연하장에서는 한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활동을 많이 시키느라 하루에 “100마일(약 160킬로미터)”을 운전한다고 자랑(?)하는 내용도 있었다 한다.

다른 이론은 실제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늘었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는 설명을 제시한다. 귀가하는 길에 구입해야 할 식료품 목록을 살펴보는 의사는 지금 식료품을 구입하고 있는 사람보다 실질적으로 더 바쁠 것이 없지만 더 부담감을 느낄 수는 있다. 반대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변호사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여가를 보내고 있는 것이지만 만약 그 변호사가 그 와중에 전화기로 사무실에서 온 메시지들을 확인하고 있다면 그는 도무지 쉴 시간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일터에서는 집안일 걱정에, 집안에서는 일 걱정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케인즈가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을 쓴 지 80여 년이 지난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을 포함한 일군의 경제학자들이 이 문제를 다시 다룬 Revisiting Keynes를 냈다. 하지만 이들도 삶의 질 향상에도 불과하고 인간의 여가시간은 그리 늘지 않았다는 데에 당혹한 듯하다.

이 책의 공동저자 중 몇몇은 케인즈가 인간의 본성을 잘못 읽었다고 지적했다. 케인즈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살 수 있을 만큼 벌기 위해서 일을 한다고 추정했다. 그래서 수입이 늘면 더 짧은 시간의 노동으로 원하는 만큼을 벌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새로운 것들을 더 찾아낸다. 케인즈가 살던 시절에는 노트북이나 전자레인지, 스마트폰, 프라다 가방, 트루릴리전 청바지 따위가 없었다.

최근 세상을 떠난 게리 베커(시카고대)와 루이스 라요(런던정경대)는 대부분의 물질적 소비는 습관을 형성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처음의 흥분이 지나고 나면 통상적인 소비자는 자신이 구매한 것에 익숙해지게 되고, 다음 제품을 구매하고자 열망하게 된다. 이러한 불만족성은 인간에게 내장된 것이고, 인간은 자신의 주변환경이 나아지면 비교점 또한 상향 조정되도록 진화했다는 것이 베커와 라요의 설명이다.

반면, 컬럼비아 대학의 조셉 스티글리츠는 구성주의적인 접근법을 취한다. 사람이 무엇을 고르는가는 사회에 의해 빚어지는 것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구속적이 된다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유럽과 미국의 경우를 비교한다. 1970년대에는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인 모두 미국인들만큼 많은 시간을 일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여가를 위해 소득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평균적으로 영국인에 비해 한 해 140시간을 더 일하며 프랑스인에 비해서는 300시간을 더 일한다. 미국인들은 앞으로도 더 소비에 집중하게 될 것이지만 유럽인들은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여가를 더 선용하게 될 것이라는 게 스티글리츠의 예측이다.

노동보다 여가가 선호된다는 케인즈의 가정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경제학자들도 있다. 콜럼비아 대학의 에드워드 펠프스는 직업이 오늘날의 사회에서 달성 가능한 자기실현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하버드 대학의 리처드 프리먼은 심지어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유일한 전진의 길”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어쩌면 소득 격차의 증대가 이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의 소득 격차는 과거에 비해 더 심각해졌고, 따라서 여가를 즐길만한 여유가 있는 부유층은 예전보다 더 줄어들었다는 설명은 직관적이다. 그렇지만 팩트는 이와 같은 설명을 부정한다. 소득 격차가 늘어나면서 실제로 여가가 가장 많아진 것은 저임금 노동자들이었다. 시간에 대한 압박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은 보통 고임금자들이다. 텍사스 대학교의 다니엘 해머메쉬와 서강대의 이정민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엘리트의 푸념”이라고 이른다.

그렇다면 왜 이 엘리트들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푸념을 하는 것일까? 승자독식의 사회에서는 승리하는 편에 있어야 할 유인이 크고 이를 위해서는 경쟁자보다 더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도 한 가지 설명이 될 수 있다. 또한 ‘장시간 노동 프리미엄’이라는 것도 있다. 임금노동자가 통상적인 노동시간인 주 40시간을 초과하여 근무할 경우 실질적으로 받게 되는 프리미엄을 뜻하는 단어인데, 지난 30년 동안 이 프리미엄이 두 배 이상 상승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임금이 높을수록 보상도 크다. 마트에서 일하는 점원과 헤지펀드 매니저가 각자 자기 아이의 야구 경기를 보기 위해 반차를 쓰는 것을 고려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마트 점원은 반차를 써도 벌지 못하게 될 임금이 40달러를 넘지 않겠지만 헤지펀드 매니저는 수백만을 날리게 될 수 있다. 계속 일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 불균형적이기 때문에 그 동기 또한 불균형적이 된다.

케인즈는 자본주의의 과실이 자본주의를 구원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의 에세이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은 그러한 케인즈적 유토피아를 그린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래는 케인즈가 예견한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전세계의 부는 그 어느떄보다도 크게 자라났지만 불평등 또한 심화되었고, 여가는 희소해졌으며, 심지어 부자들조차도 시간이 없어 압박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부를 쌓는 것이 답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 자체를 재고해 보는 것도 좋은 방안일 것이다. 그럴 시간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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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올라올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읽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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