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에서 온 재즈의 기인(奇人) 선 라: 네이버캐스트

예술과 영성의 관계를 논하는 데 선 라만큼 좋은 소재가 없습니다. 사실은 보다 오래 묵혀두었다가 쓰고 싶었던 소재이지만 결혼을 준비하면서 여러가지로 바빠 새로운 소재를 발굴할 여력이 별로 없었기에 조커를 너무 이르게 써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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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가 워낙 많은데 지면은 한정이 되어있다 보니 여러 문단을 잘라내야 했습니다. 그 중의 일부들을 이 블로그에나마 공개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허먼에게도 징집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즉각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이는 당시 흑인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결국 대체복무 허가가 떨어졌지만 허먼은 이마저도 거부하면서 소송을 제기한다. 당시 허먼은 성경과 법률 등을 인용하면서 대체복무의 부당함에 대해 항변했다. 그의 언변과 지능, 그리고 고집에 감탄한 판사가 “자네 같은 깜둥이(nigger)는 지금껏 본 적이 없네” 라고 말하자 허먼이 “그렇소,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영영 못 볼 것이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1968년, 선라와 오케스트라가 세들어 살던 건물이 매각되면서 이들은 뉴욕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이주했다. 선라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곳을 거점 삼아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뉴욕에서의 활동 이후로 선라는 이제 나름대로의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1969년에는 [롤링스톤]의 표지에도 등장했고, 1978년에는 SNL에서 출연하여 연주를 보여주기도 했다. 아마 SNL 역사상 가장 난해한 음악가 게스트였을 것이다. 방송국에는 시청자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8일 전에 79번째이자 마지막 생일을 맞았다. 건강은 더욱 나빠져 이제는 웅얼거릴 수만 있는 정도였다. 그는 말하려 하기를 그만두고 대신 찾아온 사람들의 손을 부여잡았을 뿐이었다. 너무 세게 잡아 때로는 두 사람이 달려들어 그의 손가락을 풀어야 했다고 한다.

 

선라는 자신이 이 시기에 외계인들의 부름으로 UFO를 타고 토성에 가서 음악가이자 창조주의 사도로서의 소명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대학을 그만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살펴볼 것이지만 그의 주장에는 다소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실제로 그는 선라로 활동하면서부터 의식적으로 과거를 은폐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본명에 대해서도 철저히 숨겼고(실제로도 버밍햄에서의 그의 출생기록서는 유실되어 그의 사후에도 몇 년 동안은 그의 본명과 생년월일이 미스테리로 남아있었다) 자신은 토성에서 왔으며 어머니도 아버지도 가족도 없다며 개인사에 대한 질문을 모두 회피했다. 가끔씩은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주기도 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선라는 공연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대체의학에 관심이 많던 친구가 그를 시카고의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앞에 두고 연주를 하게 한 적이 있었다. 긴장증과 정신분열증 환자들에 대한 일종의 음악치료였다. 선라는 환자들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연주를 하는데 수 년간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던 한 여성이 벌떡 일어나 그의 피아노 앞에 다가가 “이걸 지금 음악이라고 하는 거요?”이라고 소리쳤다. 선라는 무척 즐거워 했고 이후에 음악의 치유력에 대한 증거로 이 일화를 자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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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올라올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읽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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