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 신화의 공포와 마력

엔씨소프트 블로그의 게임과 신화 세 번째 연재: http://blog.ncsoft.com/?p=23657

이 연재글은 두어 차례 초안을 새로 쓴 이후에 완성됐는데 개인적으로는 이전 버전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이전 버전의 초안을 아래에 함께 싣습니다.


서구 국가와 일본을 제외하고 게임 업계에서 약진하는 국가들 중 제가 주목하는 국가는 바로 폴란드입니다. 동구의 구 공산권 국가 중에서는 그나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된 나라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아직 한국에 비해서는 1인당 GDP가 1만 달러 정도 낮죠.

그런데 그런 폴란드에서 한국의 게임 업계가 우러러 볼 수준의 메가히트 게임이 작년에 나왔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이라면 적어도 이름만큼은 귀에 박히도록 들어보셨을 ‘위쳐 3: 와일드 헌트’입니다.

2015년 ‘올해의 게임’상을 싹쓸이 한 워쳐 3는 발표 후 1년 동안 전세계에서 1천만 카피 이상을 팔아치웠습니다. 개발사인 CD프로젝트는 위쳐 3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게임 개발사로 자리매김했죠. 폴란드 게임 산업이 들썩들썩하니 폴란드 정부도 최근 자국의 게임 업계를 지원하기 위한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생소하지만 매력적인 슬라브 신화에 바탕한 게임

위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기존의 판타지 게임과는 확연히 다른 세계관도 있습니다. 주인공인 게롤트의 직업(?)인 ‘위쳐(witcher)’부터가 독특하죠. 마녀(witch)라면 다들 익숙합니다만 대체 위쳐는 뭐죠?

사실 위쳐라는 존재를 비롯해서 위쳐 시리즈에 나오는 캐릭터(몬스터)들은 대부분 슬라브 신화에서 따온 것들입니다. 본래 베드마크(vedmak)라는 이름으로 슬러브 신화에서 전해내려오던 이 존재는 당시 ‘마녀’의 남성형, 그러니까 남자 마법사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이미지 일색인 마녀와는 달리 베드마크는 보다 선한 면모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을 치료해주기도 하고 마녀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걸 막기도 한다 하는군요. 물론 베드마크 또한 사람을 해치고 농사를 망치기도 하며 늑대나 나방과 같은 다른 생물체로 변신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베드마크란 이름은 슬라브족 국가에 속하는 러시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 세르비아 등의 각각의 언어로 전승을 거쳐 내려오는데 (발음은 거의 비슷합니다) 폴란드에서 안제이 사프콥스키라는 작가가 1986년 ‘비에트민(wiedźmin)’이라는 단편을 통해 베드마크가 주인공인 판타지 소설을 발표합니다.

비에트민은 베드마크의 폴란드어인데 이 단편이 호평을 얻자 사프콥스키는 이 주인공과 세계관을 발전시킨 장단편 시리즈를 연달아 내놓았고 마침내 폴란드의 대표적인 판타지 소설가가 됐어요. 위쳐 시리즈는 바로 이 비에트민 시리즈를 게임화한 것입니다.

사실 비에트민 시리즈는 2000년대까지는 동구권에서만 유명한 소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쳐 게임이 성공하면서 원작 소설에 대한 관심이 영어권에서도 커졌고 그리하여 최근까지 꾸준히 소설 시리즈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세 권 정도가 번역 출간된 바 있습니다.

슬라브 신화란?

슬라브 신화란 슬라브어파의 언어를 사용하는 유럽 민족(슬라브족)의 공통적인 신화를 가리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의 중부 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의 신화라고 보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슬라브 신화도 북구 신화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내려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슬라브 신화에 대한 일차 문헌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슬라브족이 직접 자신들의 신화에 대해 기록한 게 없다는 겁니다.

슬라브족은 9세기경 중부 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까지 자체적인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았던 걸로 여겨집니다. 때문에 모든 신화 등의 전승은 구전으로만 내려왔습니다. 11세기 후반이 되면 중부 유럽에 거주하던 슬라브족의 대다수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슬라브 신화를 비롯한 슬라브족 고유 문화는 명맥이 많이 끊겼습니다.

위쳐 시리즈의 주인공인 게롤트는 검을 두 개 갖고 다닙니다. 하나는 쇠로 된 검으로 주로 사람(…)이나 동물들을 잡을 때 쓰고 다른 하나는 악마들을 잡을 때 쓰는 은으로 된 검입니다. 이 은으로 된 검에는 독특한 문자가 새겨져 있는 걸 볼 수 있죠.

보통 북구 신화의 영향을 받은 게임 등의 창작물에서는 이런 마법장구에는 으레 룬 문자가 써있습니다. 그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의 간지(…) 때문이죠. 슬라브 신화를 기반으로 한 위쳐는 다릅니다. 게롤트의 검에 새겨진 문자는 바로 슬라브어 문자 중 가장 오래된 글라골 문자입니다.

5만년 쯤 후에는 한국 게임에서 주인공이 꺼내는 검에 ‘커엽다’ 같은 야민정음이 써있을지도 모르죠 뭐…

그런데 정작 글라골 문자가 슬라브족이 개발한 게 아니라는 건 함정. 실은 기독교 선교사가 만든 문자입니다.

9세기 중후반 기독교 선교를 위해 중부 유럽에 파견된 성 키릴로스가 슬라브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기존의 라틴어나 그리스어 문자가 슬라브어의 표기에 적합하지 않음을 깨닫고 슬라브어 표기를 위한 문자를 새로 개발합니다. 이 정도면 얼마나 언어의 천재였는지 알만하죠.

이렇게 개발된 문자가 바로 슬러브어 관련 문자로는 가장 오래된 글라골 문자입니다. 현재 러시아어를 비롯한 많은 슬라브어권 언어의 문자로 사용되는 키릴 문자는 글라골 문자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사실 러시아어를 잘 모를 때에 키릴 문자를 보면 대체 어떻게 읽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지만 한번 익혀보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러시아어 문법이 세계적으로도 가장 어렵다는 건 함정.

슬라브족이 직접 남긴 기록이 없다보니 슬라브족의 생태나 신화에 대한 기록은 죄다 다른 민족이 남긴 것뿐입니다. 주로 여행자나 탐험가의 풍문을 듣고 기록한 것이니 높은 정확도를 기대하긴 어렵죠.

슬라브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5세기에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가 자신의 유명한 저서 ‘역사’에 남긴 것입니다. 여기서 헤로도토스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에 사는 네우로이족에게 특이한 능력이 있어서 매년 며칠동안 늑대로 변신한다고 씁니다. 심지어 자신은 이 말을 믿지 않지만 워낙 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맹세를 하면서까지 그리 말해서 썼다고 합니다.

어쩌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있던 늑대인간의 신화일수도 있고 어쩌면 베드마크(위쳐) 같은 독특한 능력을 가진 존재에 대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르죠.

위쳐에서 만나는 슬라브 신화

위쳐 뿐만 아니라 궁극의 적의 설정(와일드 헌트의 수괴인 에레딘이 위쳐 1에서 주인공의 애인을 납치하는) 등의 게임 곳곳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슬라브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들입니다.

위쳐 3에서 가장 저를 소름돋게 만든 캐릭터는 보츨링이었어요. 매우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위쳐 3에서 최고의 퀘스트로 꼽히는 ‘집안 문제’ 퀘스트에서 등장하는데 아버지의 학대로 어머니가 유산한 이후 제대로 된 장례를 못 치르고 묻힌 태아가 괴물로 변신한 것입니다.

으으…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슬라브 신화의 ‘포로녜치’라는 악마가 보츨링과 매우 유사합니다. 포로녜치 또한 유산된 태아나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하도 매장된 유아가 악마로 변신한 것을 가리킵니다. 실현되지 못한 생명의 가능성 때문에 포로녜치는 매우 강력한 악마로 여겨진다고 해요. 게임에서 게롤트는 보츨링을 죽여서 없애거나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어 극락왕생(?)하게 해줄 수도 있습니다.

보츨링 못지 않게 인상적인 캐릭터로 숲 속의 마녀, 크론 자매(Crones)를 꼽을 수 있죠. 숲 속에 살면서 그 일대에 거의 종교와 같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이 마녀들 또한 슬라브 신화의 ‘바바야가’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독특한 캐릭터가 많은 위쳐3에서도 무척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 세 자매님들

바바야가(‘노파’ 또는 ‘추녀’라는 뜻입니다) 또한 숲 속에 사는 기괴하게 생긴 노파(때론 크론 자매와 마찬가지로 세 명의 노파 자매로 나오기도 합니다)의 모습을 한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전승에서 바바야가가 양면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는 거에요. 자신과 마주친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바야가 전승에 대한 책을 쓴 연구자 안드레아스 존스는 바바야가를 두고 슬라브 전승에서 가장 인상적인 존재라고 평가합니다. 죽음이기도 하고 겨울이기도 하고 대지의 여신이기도 한 수수께끼 같은 존재라고 하면서요.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남성이 갖고 있는 무지와 그에 따르는 공포감 같은 걸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가부장제가 확립되기 이전의 모계중심 사회의 ‘대모(matriarch)’를 가부장 사회가 회고하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전승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편이라 한국의 전승에서도 ‘마고’라는 지모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아있는 묘사를 보면 바바야가와 꽤 비슷합니다.)

콘텐츠와 기획, 개발력의 승리

한국에 비해 경제적으로 부진한 편인 폴란드에서 위쳐 3과 같은 세계적인 수작이 나왔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한국 게임 업계의 개발 능력이 폴란드에 뒤쳐질리 만무한데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게임 자체를 잘 만든 것은 물론 당연한 요인일 테죠. 거기에 슬라브 신화 특유의 존재들을 전세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드라마의 형태로 직조한 개발사와 원작자의 역량 덕이 클 것입니다.

문화라는 것은 경제적 측면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꼭 경제적 측면만으로 설명이 되는 건 아니죠. 신화라고 하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문화 콘텐츠를 가장 훌륭하게 가공하여 성공시킨 사례로 위쳐 시리즈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거론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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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올라올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읽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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