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의 계절이 돌아왔다. 벽에 붙어 있는 보일러 리모콘은 벌써 이렇게 생긴 것들을 십 년이 넘게 쓰고 있음에도 도무지 올바른 사용법을 모르겠다. 사용자의 불편함을 목적으로 설계한 (난 확신한다) 신도림 테크노마트의 엘리베이터들처럼, 부러 우리들로 하여금 의도와는 다르게 보일러가 가동되게 만듦으로서 자기네들의 제품 회전 사이클을 단축시키고 가스공사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사실 보일러 리모콘에는 이렇게 많은 버튼들이 필요없다. 파스칼은 “인류의 모든 문제는 방 안에 혼자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이를 빌어 보일러 가동의 모든 문제들은 그저 ‘한 번만 연소하기’ 버튼이 없다는 데서 비롯한다고 말하고 싶다.
10분이든 20분이든 30분이든, 단 한 번만 연소 가동을 하게 하는 버튼만 있으면 된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다. 정작 필요한 것은 없고 필요하지 않은 것들만 있어서, 나의 보일러 역정은 건망증으로 인한 낭비와 그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인식론적 우울로 점철되어 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씻으려고 할 때면 보일러를 가동시키곤 한다. 어차피 씻을 물을 데워야 하고, 기왕이면 외출 상태에서 온수만 나오게 하느니 방 안도 덥히면 좋으니까. 문제는 씻고 나서 다시 ‘외출 모드’로 돌려놓는 것을 잊고 잠들었을 때가 잦다는 데 있다.
겨울답지 않게 너무나 따뜻한 공기를 마시는 것에 놀라 잠을 깨면 이미 불안한 예감이 들고 있다. 침대를 빠져나와 방바닥에 발바닥을 내려놓는 순간, 나는 나지막이 욕을 내뱉는다. 너무 뜨거워서. 리모콘 확인 안하고 잠든 내가 한심해서.
몇 시간 동안 연속으로 돌아간 보일러 덕택에 방바닥은 지옥처럼 뜨겁다. 그리고 그 지옥의 운영유지비를 부담하는 것은 바로 나다. 내가 피땀흘려 번 돈으로 사탄은 나만을 위한 지옥을,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미국의 몇몇 민영화 된 교도소는 수감자가 자신의 수감 비용도 부담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타는 발바닥—육신의 고통과 곧 다가올 가스요금 고지서의 심상이 내 영혼에 주는 고통. 제발 그 버튼 하나만 달아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