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미군 표현으로 SNAFU라는 게 있다. Situation Normal, All Fucked Up의 약자로, 우리말로 옮기자면 ‘근무중 이상무, 다 좆됐음‘ 정도가 될 테다. 한국 군대가 돌아가는 모습을 가장 함축적이면서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한미혈맹 이상무!”)
부대 앞 헌병 애들이 야간에 몰래 치킨을 시켜먹었다가 당직사관에게 딱 걸렸지만, 부대 지휘관 입장에서 이런 사건이 공개적으로 알려져서야 도움될 것이 없다. 부대장은 여단장 상황보고에도 그저 ‘이상무’를 외칠 뿐이다. 치킨을 먹은 것을 들켰다는 사실에 지레 겁을 먹은 초병이 군무이탈을 시도하기 전까지는. 군대 뿐만 아니라 모든 조직에서 ‘사고’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이걸 따서 이름 붙인 원리(SNAFU principle)도 있다. ‘소통이란 동등한 위치에서만 가능하다‘는, 유래에 비해 매우 고상하게 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생각해 보면 매우 단순한 진리이다. 오늘 무슨 일들이 있었건 간에 노크 귀순 같은 ‘사고’만 없다면, 합참에서 일선 부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보고는 ‘이상무’로 가득할 것이다.
단지 군대에서만, 혹은 회사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인간관계의 소통 오류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부분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것이 가장 악랄하면서도 가장 비극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인간관계가 바로 구루(스승)와 제자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왜냐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사람에게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없어도 살 수 있고 애인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우리 주변에 많이 있지 않은가), 스승이 없이는 살 수 없다. 그게 꼭 현실의 인격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마음 속에 스승 한둘 씩은 모시고 살기 마련이다.
홀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든 성장하기 위해서는 스승을 필요로 한다. 제자는 성장과 각성을 위해 스승에게 헌신하고 스승은 이를 위해 아무런 사심없이 제자를 이끌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우랴. 그러나 모든 비극은 스승 또한 인정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인 경우가 대다수라는 데에서 일어난다.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구르지에프와 우스펜스키의 관계일 것이다. 우스펜스키는 구르지에프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지금까지도 20세기에 영성에 관하여 쓴 책들 중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책들을 썼다. 그럼에도 자신이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에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구르지에프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였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에게 재앙이 되었다.
여러가지 측면을 두고 볼 때, 구르지에프는 우스펜스키를 이용했으며 그의 발전 가능성을 오히려 차단해 버렸다고 봐야 할 듯하다. 우스펜스키 일생 최대의 실책은 너무나 우직하게 스승을 믿고 헌신한 것이었다.
가장 극명하게 그 비극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영성 쪽에서 풍부하게 찾을 수 있어 ((‘스승’이라고 떠받들어지는 모든 이들이 그렇다. 난 지금까지 슈타이너 말고 다른 예외를 접한 적이 없다. 슈타이너도 또 혹시 모른다.)) ‘구루’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굳이 이렇게 멀리서 사례를 찾을 것도 아니다. ‘지금, 여기’에도 수없이 많은 구루들이 가뜩이나 미세먼지로 흐린 인간계를 더 어지럽힌다.
재물이나 값싼 명성을 탐하는 구루들이야 잠깐만 살펴봐도 쉽게 식별이 가능하지만 가끔은 보다 세밀한 욕망을 가진 구루들도 볼 수 있다. 이들의 감각은 보다 세련되었기에 저급하게 재물이나 값싼 명성을 찾지 않는다. 이들은 ‘제자’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싸구려 명성과 재물을 탐하는 이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열의와 경외감이 주는 달콤함을 안다.
너무나 세속적인 것에 관심을 그리 두지 않는 것을 알기에, 제자들은 자주 그들의 구루가 품고 있는 본의를 곡해한다. 그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순전히 다 나를 위해서일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걸 내게 시킬 리가 없어. 그는 좋은 사람이니까. 바로 이것이 그 둘의 관계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알작시라, 가장 악랄한 욕망은 가장 세련되기 때문에 악랄한 것임을.
메인 사진: 구르지에프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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