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는 진짜지만 ‘세계의 종말’은 아니다. 게다가 가장 시급한 문제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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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말 출간된 후 아마존 환경 분야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어포칼립스 네버’가 도발적으로 던지는 화두다.

저자 마이클 쉘렌버거는 한국에도 꽤 알려지긴 했지만 매우 단편적으로만 그렇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에게 탈핵 정책을 재고해달라고 공개 서한을 보내고 한국을 방문해서 경주를 탐방하고 친원자력 단체들 행사에 참가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1일각에서는 환경운동가로 위장한 친원전론자라고 폄하하기까지 하는데 아무리 원전이 싫어도 이런 주장은 너무 억지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환경운동하고 대학생 때는 브라질로 가서 환경운동하던 사람이다.

쉘렌버거는 환경운동을 하다가 관점의 대전환을 겪는데 2007년에 공저한 『Break Through』에서 이미 그 골자를 밝혀놓았다. 혹자는 환경모더니스트ecomodernist라고 일컫는 이 관점은, 경제 발전을 아예 부인하는 환경주의environmentalism 대신 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경제 발전을 추진할 것을 주장한다.

Break Through를 읽은 지가 조금 되었지만 당시에는 환경운동의 주장이 정치적으로 통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경제 발전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 대중의 기대를 무작정 종교적 금욕주의 같은 방식으로 부인해서는 안된다는 고려가 더 크게 작용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쉘렌버거는 2005년 GM과 포드가 도산 위기에 처했을 때 생산 차량의 연비를 개선시키면 피고용자의 의료보험 비용을 경감시켜주는 구제안을 만드는 데 (당시 상원의원이던) 오바마를 돕기도 했다.

원자력에 대한 입장 변화는 그보다 나중에 온 것 같다(Break Through에는 원자력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그 이후로는 매우 적극적으로 원전을 옹호해왔다. 내가 쉘렌버거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런 내용의 그의 칼럼을 WaPo에서였나 Forbes에서였나 읽은 후부터였다.

쉘렌버거는 이 책에서 ‘종말론적 환경주의자(그가 쓰는 표현이다)’들이 주로 하는 주장들에 대해 하나씩 반론을 제기한다:

  • 기후변화는 사실이지만 인류는 물론이고 생물종 다양성도 그것으로 인해 큰 위협을 받지는 않는다
  • 브라질의 농업 현대화를 효과적으로 저지한 그린피스의 활동은 보우소나루의 집권에 한몫을 했다
  • 저임금노동sweatshop이 환경을 살린다
  • 고래를 구한 건 그린피스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다
  • 플라스틱은 다른 대안들보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
  • 모두가 비건이 된다 하더라도 그 환경적 영향은 미미하다

(그밖의 내용과 세세한 논거는 여기서 더 나열하진 않겠다. 쉘렌버거도 책 팔아야지…)

하지만 쉘렌버거가 가장 설득력 있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가는 부분은 역시 에너지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핵을 제외하고는 친환경적이면서도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원은 없다.

곧바로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한 답이 그의 관점을 더욱 뚜렷하게 해준다.

의문1: 핵은 정말 친환경적인가?

여기서 쉘렌버거는 저명한 에너지 전문가 바츨라프 스밀을 빌려온다. 핵심은 에너지원이 갖고 있는 에너지의 밀도다. 에너지의 밀도가 높을수록 효율도 높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적다.

석탄 1kg는 나무 1kg에 비해 거의 두 배의 에너지를 갖는다. 1kg의 LPG는 쌀겨 같은 바이오매스에 비해 3배의 에너지를 갖는다. 풍력 발전은 천연가스 발전에 비해 450배의 부지를 필요로 한다. 태양광은 1평방미터 당 최대 50와트의 전기를 생산하는 반면 천연가스는 2000와트, 원자력은 6000와트를 생산한다.

대체로 에너지 밀도가 높을수록 환경오염이 덜하다. 우리는 석탄발전소에 나오는 분진을 우려하지만 이는 사실 나무를 태울 때에 나오는 오염물질에 비해서는 양반이다(바로 이것이 저개발국가가 직면한 과제다).

그런데 원자력발전에는 핵폐기물이 나오지 않나? 쉘렌버거는 오히려 원전 폐기물이야말로 적절한 처리를 하면 외부 자연환경으로 유출되지 않고 ‘내면화’할 수 있다면서 다른 에너지원과 차별화를 꾀한다. 게다가 지금까지 생성된 전세계의 모든 핵폐기물을 모아도 운동장 사이즈의 지하 벙커에 다 넣을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같은 사고도 있지 않았나? 쉘렌버거는 여기서 의외의 사실들을 거론하는데 먼저 체르노빌 사고 직후 초동대응조로 투입된 인원들이 사망한 것 외에는 체르노빌 사고가 대중 건강에 미친 영향은 약 2만 명에게 발생한 갑상선암이 유일하다고 한다. 2017년 유엔 보고서는 이 중에서도 25%에 해당하는 5천 명 가량만 체르노빌 방사선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한다.

사고 이후의 후쿠시마 지역에서 나오는 방사선은 미국 콜로라도 평원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방사선의 양보다 적으며 심지어 콜로라도 평원에서도 주민의 암 발생률은 타 지역에 비해 높지 않다고 한다.

원전 사고로 인한 역대 총 사망자 수는 100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라고 쉘렌버거는 말한다.

의문2: 에너지 수요는 더 늘어나야 하는가?

인류는 이미 과도한 양의 에너지를 쓰고 있지 않나? 이제는 성장일변도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아닐까? 쉘렌버거는 이것이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의 자기중심적 시각이라고 비판한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극빈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가난을 탈출하고 저개발국가가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으려면 충분한 에너지의 공급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선진국 환경운동가들의 활동 초점은 이들 국가들의 산업화와 현대화를 저지하는 것에 맞춰져 왔다.

“교조주의적 채식주의의 문제는 교조주의적 환경주의의 문제와 동일하다. 동물이 처한 상황을 개선시키고 농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는 데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에너지원의 선택에 대한 가치 판단은 그 밀도(그리고 환경영향)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천연가스나 원자력 같이 밀도가 더 높은 에너지를 쓰다가 석탄을 쓰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무를 쓰다가 석탄을 쓰는 것은 그 단계에서는 오히려 장려할 일이다. MIT의 기후 과학자 케리 이매뉴얼은 2070년까지 대기 중 이산화탄소 양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인도에서 석탄을 많이 사용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직도 인도에서는 나무나 쌀겨 등을 태워서 에너지로 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모든 국가들에게 일률적으로 특정 에너지원을 강요해선 안된다는 게 쉘렌버거의 논지다. 인도의 연구진은 히말라야의 산간 마을 주민에게 LPG 보조금을 지급하자 벌목이 줄어들고 숲의 생태계가 회복됐다고 한다.

쉘렌버거는 향후 인류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세계 인구를 먹일 수 있는 식량생산을 위해서는 작물 재배의 고밀도화(비료 생산), 첨단 기법의 생선 양식(지상의 대형 수조에서 연어를 양식하는 등), 공장식 축산이 필요한데 모두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이를 맞출 수 있는 에너지원은 원자력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태양광과 풍력이 대안이 될 수 없는 까닭

그런데 태양광과 풍력 발전도 있지 않나? 그러나 쉘렌버거는 둘의 에너지 밀도가 낮고 발전 항상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에너지 밀도가 낮다는 것은 필요한 양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데 더 많은 자원이 소요됨을 뜻한다. 천연가스나 원자력 발전소에 비해 훨씬 넓은 부지를 필요로 한다. 그럼 결국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자연환경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

태양광과 풍력은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공해가 없지만 태양광 패널의 제조과정과 폐 패널의 처리에 따르는 공해 문제가 남는다. 풍력 발전 터빈은 특히 대형 조류에게 위험하다.

탄소 저감 차원에서는 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태양광과 풍력은 모두 환경의 변화에 따라 발전량이 들쭉날쭉한다. 결국 이를 보조하기 위해 화석연료를 사용해야 하는데 발전소를 계속 스탠바이하고 있는 과정에서 탄소 발생은 물론이고 에너지 생산 비용도 높아진다.

그래서 쉘렌버거는 엑손모빌, 쉐브론, 로얄더치셀 등의 오일/가스 대기업들이 막대한 금액을 재생에너지 홍보에 투입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재생에너지를 많이 쓸수록 천연가스 발전을 덩달아 많이 사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독일은 쉘렌버거가 태양광과 풍력을 두들겨 패기 위해 동네북처럼 동원하는 사례다.

프랑스와 독일은 현재 서로 다른 길에 놓여 있는데 독일은 탈원전을 빠르게 실시 중인 반면 프랑스는 현존하는 원전 대부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독일에 비해 전기 생산비용은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인데 탄소 배출량은 독일의 10분의 1 가량이다.

태양광과 풍력으로 생산한 전력을 수소 연료전지로 저장해서 나중에 발전량이 떨어질 때 쓰겠다는 것이 독일의 에너지 전환 정책의 주요 사항 중 하나인데 현재의 전망은 매우 암담하다고 한다. 태양광/풍력으로 전기를 만들고 그 다음 이를 수소로 만들고 그 다음 이를 메탄으로 만드는 과정 사이사이에서 손실이 발생해 그 효율은 40% 미만이라고 한다.

맥킨지는 독일의 에너지 전환 정책을 두고 국가 경제와 에너지 공급에 상당한 위협이라고 평가했다. 그것도 기후 보호, 에너지 공급 안정성, 경제적 효율성의 세 가지 측면 모두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단다. 독일은 2019년 7월에는 블랙아웃 위기를 사흘이나 겪었다고 한다.

중산층의 세속종교가 된 환경주의

책의 말미에서 쉘렌버거는 익스팅션 리벨리언과 그레타 툰베리로 대표되는 작금의 환경주의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분석을 한다.

“오늘날 환경주의는 대부분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중상류층 엘리트의 세속종교다. 집단으로서의,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목적에 대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제공한다. 선인과 악인, 영웅과 악당을 정해준다. 게다가 이를 과학의 언어로 전달해 정당성을 부여한다.”

환경주의와 그 자매품인 채식주의가 일견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급진적으로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신을 자연으로 대체한 새로운 유대기독교 종교라는 분석은 이 양반이 존 그레이에 빙의됐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레타 툰베리의 경우는 나도 그가 환경운동에 투신(?)하기 전에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해 우연히 읽어보다가 너무나 전형적인 새로운 종교지도자로서의 개심 직전 정황이어서 놀랐던 일이 있다.)

이러한 분석에서 쉘렌버거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종말론적 환경주의가 사람들에게 먹히는 까닭은 의미와 목적에 대한 인간의 본원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과학과 종교의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합리주의적’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게다.

그래서 쉘렌버거는 합리주의를 넘어서 ‘인본주의적 환경주의’를 말한다. 인류가 특별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서 인류 문명과 인류 그 자체를 힐난하는 종말론적 환경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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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각에서는 환경운동가로 위장한 친원전론자라고 폄하하기까지 하는데 아무리 원전이 싫어도 이런 주장은 너무 억지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환경운동하고 대학생 때는 브라질로 가서 환경운동하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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