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바흐Laibach가 평양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며 그리하여 북한 역사상 최초로 공연하는 서구 록밴드가 될 거라는 소식을 읽고 매우 절묘한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북한에서 공연하기에 가장 적합할 밴드를 고르라면 정말 라이바흐만한 그룹이 없거든요.
라이바흐는 1980년에 결성한 슬로베니아 그룹입니다. 당시 실험음악계에서 태두하고 있던 인더스트리얼 음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여기에 군사적, 전체주의적 이미지를 씌웠습니다. 그밖에도 ‘신슬로베니아예술(NSK)’라는 예술 집단을 결성하여 운영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뮤직비디오나 아트웍에서도 NSK 작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라이바흐의 80년대 뮤직비디오는 지금 시점에서 봐도 상당히 고퀄입니다.
라이바흐는 특히 서구 팝음악의 가사가 얼마나 전체주의적 시각을 담아낼 수 있는지, 또한 얼마나 현실을 무시/왜곡할 수 있는지를 음악(그리고 퍼포먼스)으로 보여줘 왔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는 Queen의 One Vision을 패러디한 Geburt einer Nation입니다:
거의 똑같은 내용의 가사를 가지고 언어를 독일어로 바꾸고 노래의 분위기를 바꾸었더니 마치 나치 프로파간다 같은 내용이 되어버리죠. 라이바흐를 세계적인 이슈로 만든 노래들이 다 이런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라이바흐는 그 어떠한 것도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 않고, 그 방법론이나 미학을 철저하게 따라하는 방식으로 풍자를 합니다. 때문에 수많은 오해를 낳았죠. 영국에서 첫 공연을 했을 때에는 극우파 팬들과 좌파 팬들이 모두 공연장에 모였다가 팬들끼리 서로 싸우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적으로도 라이바흐는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마 AutopsiA(체코)와 함께 80년대 동유럽이 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크게 공헌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군요. 극우파들이 많은 마샬 인더스트리얼 음악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독일 밴드 람슈타인Rammstein은 사실 라이바흐가 하던 걸 거의 그대로 따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라이바흐가 북한에서 공연하기에 가장 적합한 밴드라는 제 의견은 위와 같은 특징에서 나옵니다. 라이바흐야말로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해도 괜찮은(?), 그리고 오히려 그렇게 하여 정권을 비판할 수 있는 독특한 밴드이니까요.
그래서 이번 평양 공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19일 첫 공연에 대한 기사가 외신을 통해 쏟아져 나왔죠. 그중에서도 BBC에서는 북한 청중들의 반응까지 전하는 성실함을 보여주었어요:
그밖에도 흥미로운 사실들이 슬로베니아쪽 보도로 드러났습니다. 공연 전에 검열당국에서 Koran과 Eat Liver, 그리고 Final Countdown(이 곡도 라이바흐가 즐겨 커버하는 곡이죠)을 연주할 수 없다고 했다 합니다. 결국 앞의 두 곡은 연주가 되지 않았고 Final Countdown은 뒤에 상영되는 영상을 수정해서(SF 영화의 우주 전투 장면이 나오는데 이걸 두고 검열당국이 너무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하는군요) 무대에서 연주했습니다.
공연 전에 라이바흐는 이미 모란봉 악단의 ‘백두산으로 가리라’의 커버를 영상과 함께 인터넷에 공개했는데 이 또한 평양 공연에서는 연주가 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곡의 템포가 다르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기이한 이유와 함께요.
https://www.youtube.com/watch?v=HVDbQUZefjE
https://www.youtube.com/watch?v=W3fYbSfDSmU
라이바흐는 2006년에 전세계 국가들의 국가國歌를 하나씩 커버한 Volk라는 앨범을 냈는데 여기에 일본의 기미가요도 무척 그럴싸한 발음으로 커버를 했어요. ‘백두산으로 가리라’의 커버도 Volk 앨범 스타일의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금성학원(리설주가 나온 학교입니다)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이튿날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보도가 처음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혹시 Final Countdown 연주를 강행(?)한 탓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정확히는 취소가 아니라 변경이라는, 현지에 밴드와 동행하고 있는 슬로베니아 기자의 전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학교 강당의 기술적 시설이 너무 좋지 않아 라이바흐 공연을 위해 필요한 장비들을 옮기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라이바흐 공연 대신 북한 여학생 합창단이 공연을 하고 라이바흐 투어마다 동행하고 있는 Silence의 멤버 Boris Benko가 합창단과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고 합니다. 19일 공연도 원래는 김원균평양음악학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가 봉화예술극장으로 갑자기 변경되었는데 이 또한 기술적인 문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