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예언이다. 주어진 코드에서 모든 가능성을 물질 세계보다 훨씬 빠르게 탐색하기 때문에, 음악의 스타일과 경제적 조직은 사회의 나머지 부분보다 앞선다. 음악은 점차 가시화될 세계를 먼저 들을 수 있게 한다.
우연히 맞닥뜨린 이 구절에 매료된 지도 아득하다. 이것이 자크 아탈리의 <노이즈>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라는 건 한참 후에야 알게 됐고 또 <노이즈>를 손에 쥐고 읽게 되기까지는 좀 더 걸렸다. 사실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현대 프랑스 철학 전반과 사상적 지형도에서 아탈리가 점하는 위치 등에 대한 나의 이해가 지금보다 훨씬 깊어야 할 테지만, 저 구절만큼은 언제나 내게 기이한 울림을 준다. 유물론자들이 ‘하부구조’라고 부르는 물적 토대의 심저에 ‘영적 토대’라고 이름 붙일 만한 또다른 하부구조가 숨어있다는 통찰 같은 것을 나는 느꼈다. 내가 각종 예술 분과, 특히 음악과 영성의 연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도 비슷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또 이 구절은 한국 사회에 대한 상념에 하나의 우화가 되기도 했다. 유형의 물질 세계보다 더 빠르게 주어진 코드 안에서 탐색할 수 있는 무형의 세계. 서구에 비해 한국이라는 사회가 갖는 비교우위(?)라는 게 여기서 나오지 않을까? 지금의 자본주의를 이룩한 서구 사회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해 온 제도—시민사회라든지 ‘신뢰’라든지—가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흉포함이랄까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고 다스려 왔다. 그런 제도들이 전무하다시피한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자극하게 되는 모든 해악들이 그야말로 쾌속으로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 흉포함은 결국 갖은 제도들도 차례로 부식시키고 서구의 매끈하고 탄탄해 보이는 사회 속에 균열을 일으킬 게다. 그때가 오면, 한국 사회가 이미 다다른 지점은 서구에게는 하나의 예언이 될 게다. “20세기의 정치조직이 19세기의 정치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19세기의 정치사상은 18세기의 음악에서 그 맹아를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아탈리, 같은 책)
그래서 나는 줄곧 한국 사회의 앞날에 대해 비관적이었는데 근래에는 소위 가속주의자accelerationists들의 논의에 대해 조금씩 귀를 트게 되면서 또다른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중국은 오히려 한국보다 더욱 빠르게 그런 미래를 보여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근래에 만난 분께서는 중국이 지금까지 ‘시민사회’로 움직여 왔다고 하셔서 다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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