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그래가 짧게 줄인 보고서는 정말로 읽을 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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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필요한’ 조사, 접속사, 동사의 어미 사용 금지
  • 가급적 짧은 단어 사용
  • 업계 통용 약어 최대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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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어엿한 사회인이 되면 크게 변하는 게 바로 글을 쓰는 방식이다.

이 작문법을 이르는 이름도 제각각이다. 누구는 “이렇게 말고 단문형으로 써와라”라고 말하고, 또 누구는 보다 저렴한(?) 느낌의 이름인 ‘찍땡체’를 사용한다.

왜 찍땡체일까 싶은데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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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기적으로 한국 증시에서 자금 유출 가능성 있어 우려.
– ‘14.3.11(火) MSCI는 MSCI EM index에 중국 A증시 포함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고 발표하였음.
– 만일 ’15부터 MSCI EM index에 중국 A증시 5% 포함할 경우 한국 증시 비중 감소 가능성 높음.
– MSCI EM index에 중국 A증시 포함이 빠르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함.
– 한국과 대만 주식이 MSCI EM index에 완전히 포함되는 데 6~9년 소요되었음.((최근에 제가 작성한 보고서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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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찍(-)으로 시작해서 땡(.)으로 끝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우석훈 선생은 당신이 현대에서 일하던 시절 왕회장에게 들어가는 보고서는 무조건 글자크기 20pt이상(회장님이 눈이 안 좋으셔서…)으로 한 페이지 안에 끝나야 했기 때문에 회장 보고서 쓸 때마다 엄청 골머리를 앓았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만화 에서 주인공 장그래가 보고서용 문장 쓰기를 배우는 모습
만화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가 보고서용 문장 쓰기를 배우는 모습 (보고서 쓸 때 문장 줄이기에서 재인용)

사실 이러한 작문법에 대한 역사적(?)으로 가장 정확한 명명은 바로 ‘개조식’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전에서 ‘개조식個條式’이란 단어의 뜻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연원은 십중팔구 일본어이다. 일본군에서 보고서용으로 쓰던 이 방식이 일본군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은 한국군과 공무원 사회로 널리 퍼졌으리라.

개조식 서술법에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짧다.

불필요한 (보다 정확히는 그래 보이는) 요소들을 뭉텅 잘라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말의 동사 끝에 흔히 붙는 “~이다” 등의 어미까지 꺽둑썰기를 해버리니까.

군대에서부터 지금까지, 글쟁이로서 글을 쓰던 때를 제외하면, 나는 언제나 개조식을 강요당해왔다. 나의 의문은 단순하다: 개조식은 정말로 효율적인가?

보고서의 내용이 짧아진다는 측면에서는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읽는 데 드는 시간’과 ‘작성에 사용된 물질적 자원(종이)’에만 한정되어 있다.

‘읽는 데 드는 시간’과 ‘이해하는 데 드는 시간’은 다르다. 그 이해가 피상적인지 아니면 보다 더 깊이가 있는지는 또 다르다.

[su_quote cite=”이형기, 개조식 유감 (청년의사)” url=”http://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newscd=2012112000033″]개조식 문장이 이해하기 쉬워 선호된다는 주장에도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개조식 문장 기술 방식 독자 이해 용이 이유 선호” 이 말을 읽고 단박에 그 뜻을 알아 챌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su_quote]

글을 읽을 때, 우리는 글자수에 맞추어 정보를 습득하지 않는다. 300자 짜리의 글을 읽고 이해하는 속도가 3,000자 짜리의 10배일 리 없다.

그보다는 우리는 이미 각자의 언어 습관을 통해 형성한 ‘문장 이해의 틀’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문장을 여기에 대입하여 그 의미를 이해한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개조식 문장은 우리의 언어 습관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명사들의 지리한 나열은 오히려 ‘지금 내가 읽은 게 무슨 뜻인지’를 더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조사는 아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개조식으로만 이루어진 A4 3장 짜리 보고서를 읽고 나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그걸 작성하는 사람(나 같은)은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건 말해줄 수 있다.

멀쩡한 문장을 그다지 효율적이지도 않아 보이는 개조식으로 꺽둑썰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투입되곤 한다.

짧은 시간에 해당 사안에 대한 내용을 이해하고 싶다면 보고서에서 흔히들 쓰는 executive summary를 읽으면 된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에는 볼드(bold) 처리를 하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멀쩡한 문장을 개조식으로 썰어버리는 것보다는 강조가 필요한 부분만 따로 볼드 처리를 하는 것이 나중에 읽어볼 때 훨씬 이해가 쉬웠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문장을 통으로 읽고 그 문맥을 이해한다. 볼드 처리가 된 부분은 그중의 일부를 강조한다.

반면에 개조식은 이미 문맥을 난도질하고 나서 명사(또는 명사화된 동사)라는 앙상한 뼈대만 남겨,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방금 읽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머리 속에서 다시 조사를 만들어 붙이게끔 만든다.

개조식은 문장을 만드는 데도 (상식적이지도 않고 불필요한) 노력을 필요로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데도 (똑같이 불필요한) 노력을 하게 만든다.

다음 루브 골드버그 머신 콘테스트에는 개조식을 출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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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올라올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읽을 만합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장그래가 짧게 줄인 보고서는 정말로 읽을 만할까?”

  1. I strongly agreed with it.

  2. 키야… 좋은 글 잘읽고 갑니다~

  3. […] 이 개조식 문장이야말로 한국의 글쓰기 문화 최악의 적폐라는 이야기를 나는 오래 전부터 해왔다. 그냥 분량 줄이기에만 최적화돼 있지, ‘요약’의 본의를 완전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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