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기사를 쓸 때는 그 기능과 효율성을 제일 우선하게 된다.
때문에 우리가 흔히 글쓰기 실력과 동일시하는 풍부한 어휘 구사라든지 미려한 문체 따위는 실상 좋은 기사를 쓰는 것과 그다지 연관이 없을 뿐더러 외려 기사의 기능과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리드: 첫 문장이 곧 기사의 전부
기사의 첫 문장이자 전체 기사의 내용을 한 줄로 정리하는 ‘리드lede’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리드는 기사가 전달하는 사건의 주요 내용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표현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들리지만 실제로 많은 맥락이 얽혀 있는 이슈를 다룬 기사를 쓸 때는, 각기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는 디테일들의 아우성 속에서 단 몇 개만 추려내야 하는 작업이라 까다로울 때가 많다.
첫 문장이니까 당연히 글을 쓸 때 리드를 처음으로 쓰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큰 오산. 헤드라인과 리드는 본문을 다 쓴 다음에서야 제대로 쓸 수 있다.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도 기자가 판단하는 디테일의 우선순위가 바뀌기 쉽기 때문이다.
사안의 골자를 판별하고 나면 이제 나머지 디테일을 우선순위에 따라 잘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내심 없는 사람이 처음 몇 줄만 읽더라도 대강의 내용은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흔히 스트레이트 기사의 구조를 역피라미드형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문제의 사안이 오랜 기간동안 지속돼 왔다거나 여러 겹의 맥락층이 쌓여 있는 경우에는 그 사안의 배경과 맥락을 적절히 제공하는 게 리드 못지 않게 중요해진다.
맥락과 배경 제공도 중요
네이버 뉴스 홈에서 뭔가 크고 오래 지속돼 온 이슈를 다룬 기사 아무거나 하나 눌러서 읽어보라. 그 하나만 읽고서 해당 이슈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를테면 지난주 최고의 화제였던 이재용의 ‘대국민 사과’ 같은 경우, 연합뉴스의 ‘종합‘ 기사를 읽어봐도 대체 ‘파기환송심’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이 재판의 또다른 주인공인 박근혜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도 없다.
맥락을 제공한다는 게 반드시 길고 긴 부연 설명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이재용 대국민 사과의 경우 이 정도만 부연돼도 충분할 것이다:
[su_accordion][su_spoiler title=”이번 ‘대국민 사과’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를 따른 것이다” open=”no” style=”fancy” icon=”plus-circle]
- 삼성은 파기환송심 첫 공판에서 재판장이 준법감시제도의 필요성을 언급한 후 위원회를 만들었다
- 당시 재판장은 준법감시제도의 설립 여부와 이재용에 대한 양형은 무관하다고 말했으나 이후 공판에서 양형에 반영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 특검과 시민단체는 이재용 개인에 대한 양형에 준법감시제도 운영을 참작하는 것이 법리적으로 그르다고 주장한다
- 특검은 이후 재판부 기피 신청을 했으며 대법원이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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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_spoiler title=”준법감시위원회 활동의 인정 여부는 이재용이 다시 감옥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좌우할 수 있다” open=”no” style=”fancy” icon=”plus-circle]
- 이재용의 유죄 판결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삼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재용이 다시 감옥에 들어가지 않도록 ‘집행유예’를 얻어내는 것이다
- 집행유예는 징역 3년형 이하에서만 가능하다
- 파기환송을 시킨 대법원 취지를 볼 때 판사 재량으로 감형을 해주지 않으면 이재용이 3년형 미만을 받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 준법감시위원회는 판사가 재량 감형을 위한 논거로 제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su_spoiler]
[su_spoiler title=”현재 이재용이 받고 있는 재판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의 연장선 상에 있다” open=”no” style=”fancy” icon=”plus-circle]
- 삼성의 경영권 승계를 보장해주는 대가로 박과 최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를 받는다
[/su_spo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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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래도 길긴 하구나)
언론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방법
보도 기사의 딜레마는 간결함과 풍부한 맥락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그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언론사마다 그 접근법은 다른데 다소 전통적인 접근법이 있고 근래에 이뤄지는 보다 급진적(?)인 접근법도 있다.
BBC의 경우
BBC는 전통적인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나름 독특한 시도를 한다.
먼저 하나의 기사를 라디오, 웹사이트, 앱 등의 다양한 플랫폼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기사 초반의 4개 문단에 대해서는 총 사용 단어 수 등에 엄격한 제약을 가하는 편이다. 이 4개 문단이 기사의 전체 내용을 요약한다. 딱 4개 문단까지가 모든 플랫폼에서 공통적으로 송출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해당 사안에 대해 독자가 떠올릴 질문들을 먼저 배열하고 그것에 대해 기사가 답을 해주는 형식으로 맥락과 배경을 전달한다.
이재용 사건에 대한 기사는 아마도 이런 구조를 갖게 될 것이다:
- 리드를 포함, 사건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4개 문단 (직접인용 없거나 최소화)
- 독자가 궁금해 할 세부내용을 중간제목으로 넣고 서술
- 이재용은 대국민 사과에서 구체적으로 무어라 말했나? (발언 주요내용 직접인용)
- 직접 나서서 사과를 한 까닭은 무엇인가? (분석, 전문가 코멘트)
- 이재용이 지금 어떤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나? (배경 설명)
아프간에서 발생한 산후조리원 공격에 대한 BBC 기사는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본문 중간 중간의 중제에 주목할 것.
BBC만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특파원이 기사에 대한 맥락을 설명하거나 논평을 할 때 기사 내에 마치 박스 기사처럼 넣는다는 것이다.
BBC는 워낙 객관성, 중립성을 강조하는지라 팩트 전달 위주의 기사 본문과 기자 개인의 주관적인 맥락 이해와 논평이 들어가는 부분을 분리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이는 물론 기사 본문을 작성하는 사람과 특파원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건 BBC 자체의 구조와도 연결되는데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업무보고서 스타일 (Axios)
어차피 보도 기사나 업무보고서나 그 기능성이 우선시되는 글쓰기 방식이니 아예 업무보고서 스타일로 가면 어떨까? 근자에는 이런 시도가 많이 보인다.
구글이 재택근무 허용을 2020년말까지 연장한다는 포브스의 기사를 보자. 속보 기사이지만 그 와중에도 기사가 다루는 사건의 맥락과 배경을 잘 제시하는 편이다.
기사의 구조는 한국 독자에겐 그리 익숙치 않다. 핵심 1문장(topline), 주요 팩트들, 주요 배경, 이게 왜 뉴스거리인가(news peg)를 보고서 스타일로 열거한다.
이는 비즈니스 보고서의 개요(executive summary)와 유사한데 이를 유행(?)시킨 것은 미국의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Axios다.
미국에서 봉쇄가 조금씩 해제되면서 업무에 복귀하려는 노동자에 대한 코로나19 스크리닝 도구를 소개하는 기사가 액시오스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준다. (당연히) 리드가 먼저 제시되고 왜 이 기사가 다루는 사건이 중요한지(why it matters)를 설명한 다음, 직접적인 배경(driving the news)을 제시한 다음에서야 해당 기사가 다루는 중심 팩트(what’s happening)들이 나온다.
배경이나 맥락에 대한 설명이 주요 팩트에 앞선다는 것(불렛포인트의 존재는 물론이고)은 액시오스의 기사가 일반적인 기사보다는 비즈니스 보고서의 형태에 더 가깝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액시오스의 기사는 기자의 전반적인 논평/결론(the bottom line)으로 마무리된다.
(추가: 액시오스는 최근 자기네 기사/이메일 스타일을 사내 내부 커뮤니케이션 솔루션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내 페이스북에 짤막하게 소개했다)
객관성의 문제
전통적인 포맷의 기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게 무슨 기사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보도 기사나 비즈니스 보고서나 기능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고 바쁘신 회장님부터 말단 직원들까지 일목요연한 정보를 얻고 싶다는 욕구는 동일하니까 이런 형태의 발전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한 가지 큰 차이라면 바로 ‘객관성’의 정도가 될 것이다. 완전한 객관성이란 존재할 수 없지만 최대한 팩트만 나열하는 접근법과 전반적인 맥락과 논평을 제공하는 접근법에서 객관성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언론사에 대한 (너무나) 많은 선택지가 있는 상황에서 언론사(그리고 기자)가 자신의 입장만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면 중립성이나 객관성에 너무 얽매일 이유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게다가 한국의 언론은 원래부터 정론지향이었다)
보다 나은 스타일?
한국에서는 중앙일보가 독특하게 제목에 ‘[보고]’를 달고서 이런 류의 시도를 하고 있다. 그 일례로 [보고] 軍 “GP총격 대응사격, 총기고장까지 겹쳐 32분 걸려”가 있다.
일선 기자들이 집배신 등에 정보 보고하는 스타일을 차용한 것인데 한국 메이저 언론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싶지만 그외에는 악평 밖에 할 게 없다.
시쳇말로 ‘찍땡체’라고도 하는 이 개조식 문장이야말로 한국의 글쓰기 문화 최악의 적폐라는 이야기를 나는 오래 전부터 해왔다. 그냥 분량 줄이기에만 최적화돼 있지, ‘요약’의 본의를 완전히 해치는 문체다.
중앙일보의 ‘보고’에는 구조가 전혀 없다. 이게 왜 중요한지, 주요 팩트는 무엇인지, 쟁점이 무엇인지, 배경은 무엇인지를 한 눈에 알 수가 없다. 일반 독자한테 읽혀보고 평가라도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나라면 각 구성 요소(왜 중요한지, 주요 팩트, 맥락 등)별로 각각 하나의 평어체 문장을 쓰고 이걸 아코디언 포맷으로 만들어서 (위의 이재용 대국민 사과의 맥락에 대해 내가 정리한 방식) 각각의 문장을 누르면 세부사항이 펼쳐지게끔 만들겠다.
(사실 이 스타일의 원조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다. 예전에 봤던 기억이 나서 찾아보니 실제로 아코디언 포맷으로 만든 웹페이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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