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의 동화 「하느님의 눈물」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을 빌려 읊는 「대심문관」에 비견될 만하다.
「대심문관」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 본질적이면서도 냉정한 질문(그리고 답)을 던지고 「하느님의 눈물」은 생명이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집어삼키는 데 대해 그리 한다.
권정생이 통속적인 비건 감수성을 갖고 썼다면 자신이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풀’을 생각하는 산토끼가 주인공이 되진 않았으리라.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감히 이 동화가 「대심문관」과 같은 급의 불멸성을 획득했다고 생각한다.
식물을 먹는 행위에 대한 반추의 다른 사례로는 (전혀 쌩뚱맞을지 몰라도) Tool의 첫 풀렝스 앨범 Undertow의 (거의 히든 트랙에 가까운) 마지막 곡 Disgustipated가 있다.
곡은 처음에 특이한 설교(?) 소리로 시작한다.
천사가 목사를 하늘로 데려간 다음 미국 중서부의 밭으로 데려가는데 땅에서 엄청난 공포의 절규가 들려온다. 겁에 질린 목사는 천사에게 이 절규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천사는 그것이 당근들의 비명소리라고 설명한다. 내일이 추수날이고 당근에게 그날은 홀로코스트라는 게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가 이어진다:
This is necessary
This is necessary
Life feeds on life feeds on life feeds on life feeds on
가사와 노래의 톤은 (아마도 일부러겠지만) 모호하게 짜여져있다. 부러 우스꽝스럽게 한 듯도 하고 그 사이에 냉정한 목소리도 섞여있다.
<하느님의 눈물>은 같은 제목으로 1984년 출간된 동화집의 첫머리에 나온다. 나 어릴 적 어머니께서 사주셨던 걸 읽은 이후로 다시 읽은 적이 없어 다른 동화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있다가 최근에 책을 다시 사서 읽었다.
같은 동화집의 다른 동화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분단된 민족, 가족을 잃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 아이들…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작가가, 아직 통일의 이상이 밝게 빛나던 시절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다. 그만큼 이제 그 유효성은 빛이 많이 바랬다.
한편으로는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경험한 것이 「하느님의 눈물」이 보여주는 엄혹한 현실주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권정생은 동화에서는 일절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1995년 <역사비평>에 썼던 산문에서 그제서야 그때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3개월 동안의 피난생활에서 30년을 살아도 겪지 못할 일들을 겪었다. 희한하게도 인간은 극한상황에 부딪치면 거의 무감각해지는지 도무지 곁에 총알이 날아오고 바로 건너편에 폭격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가장 힘든 건 잠을 못 자고 먹지 못해 배고픈 것이었다. 밤낮 쉬지 않고 걸을 땐 폭격 따위야 조금도 두렵다는 느낌이 없고 그냥 졸음이 와서 흐느적거렸다.
권정생, 「영원히 부끄러울 전쟁」, 『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 1996)
그리고는 아래와 같은 참혹한 이야기들을 (마치 백현진 노래 가사처럼) 담담하게 술회한다:
영수네 아버지는 공비로 붙잡혀가 소식이 없었는데, 아들 영수는 학교에서 공비토벌가를 목이 터지도록 불렀다. 그 영수는 나중에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을 했다.
바위산 골짜기에서 학살당한 남편을 밤중에 몰래 업어와서 뒷산에 묻어준 용감한 아주머니도 있었다. 자식 둘을 자수시켰다가 오히려 변을 당한 원통한 어머니도 있었다. 월북한 남편을 찾아 산을 헤매다가 미쳐버린 아주머니도 있었다.
권정생, 「영원히 부끄러울 전쟁」, 『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 1996)
보도 기사보다도 더 하드보일드한 문장들 사이 사이에 어떤 배경 사건들이 있었을지는 (형용사 두어 개의 힌트를 제외하곤) 온전히 읽는 사람의 상상에 남기 때문에 몇번을 되풀이 해 읽어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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