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대체육, 그중에서도 petri meat라고도 이르는 배양육이 화제에 올랐는데 사실 나처럼 도야지를 사랑하면서도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딜레마(이것을 딜레마로 인지하느냐부터가 문제의 시작이겠다)를 가진 사람들에게 배양육은 매력적인 선택지다. 고기를 얻기 위해 생명을 배태시키고 사육해서 도살하는 잔혹함에서 손쉽게 탈출할 수 있는 옵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존 그레이에게 톡톡히 배운 게 있다면 인간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라는 건 그 역사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하며 어떠한 기술이나 혁명 같은 것으로 돌파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잠깐은 문제를 극복(혹은 회피)한 것 같아 보여도 결국 문제는 다시 돌아온다.
모르긴 몰라도 배양육을 제조하는 데 소모되는 자원의 문제 같은 사소한 것부터 그렇게 배양한 조직은 과연 생명이 아닌가 하는 윤리적인 문제도 결국 대두될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한 생명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집어삼키는 행위가 어디까지 정당한 것이냐는 거고 그래서 ‘느끼는 존재sentient being’ 등을 거론하는 비거니즘의 몇몇 분파들은 종국에는 당근의 고통을 깨닫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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