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급진주의에 대한 오해: Four Lions와 Al Qaeda and What It Means to Be Modern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식으로 소개된 적은 없으나, <Four Lions>는 ‘간지 나는’ 무자헤딘이 되고 싶었던 어수룩한 테러리스트 워너비들을 다룬, 매우 훌륭한 블랙 코미디이다. 이 정도로는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타임지 선정 2010년 최고의 영화 10선에 꼽혔다는 이야기도 해야겠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리 속에 개운치 못하게 남아 있는 의아함이 있다. 엔딩 크레딧에서 에이펙스 트윈의 놀랄만치 잔잔한 피아노 소품과 함께 흘러가는 주인공들의 바보 같은 모습들(영화를 다 보고서 이를 보는 관객들에게는 마냥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람은 터번, 수염, 그리고 9/11의 무너져 내리는 쌍둥이 빌딩,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한 음절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글귀가 쓰여진 알카에다의 기 앞에서 뭔가를 말하고 있는 故오사마 빈 라덴의 이미지 정도가 대부분이다. 알카에다는, 이슬람 테러분자들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아닌가?

네 마리의 사자와도 같이 용맹스러운 무자헤딘의 자태
네 마리의 사자와도 같이 용맹스러운 무자헤딘의 자태

영화에서 묘사하는 (비록 지망생일 뿐이지만) 테러리스트들의 모습은 그와 사뭇 달라 실소를 불러 일으키지만 또 한편으로는 혼란스럽기도 하다. 우리의 테러리스트 연습생들은 빈 라덴과 같은 선현들을 본받아 먼저 ‘서구의 물질주의에 찌든 돼지들’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를 찍고는 이를 서구의 물질주의가 만든 최첨단의 산물인 노트북으로 검토한다.

개중에 그나마 좀 똘똘한 편인 오마르(리즈 아메드 분)은 집에서는 잠들기 전, 자신의 아들에게 지하드를 주제로 한 동화를 들려주는데 그것은 바로 미제의 앞잡이 디즈니가 만든 <라이온킹>에 내용만 오마르가 바꾼 것이다. 오마르의 개정판에서 심바는 지하드의 전사, 무자히드(무자헤딘의 단수형)가 되고 악의 상징 스카는 서구 정신의 대변인이 된다.

오마르가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설득하려 찾아온 독실한 무슬림인 형에게 그는 이슬람 교리 공부나 율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며 대든다. 아니, 어떻게 이런 신실하지 못한 마음으로 성스러운 전쟁(지하드)를 치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얼치기들이라지만 이 친구들은 너무한다. 뒤늦게 오마르의 ‘조직’에 합류한 하산(아셔 알리 분)은 힙합을 좋아하는 청년으로서 (이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투팍을 인용하며 랩으로 무자헤딘의 정신을 노래한다. 대망의 자폭테러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 일당이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래는 뭔가 종교적인 느낌의 성가가 아닌, 한때 많은 인기를 끌었던 한 브릿팝 밴드의 노래다. 이쯤 되면 알카에다에서도 우리나라 국방부에서 종종 부르짖는 ‘군기강 확립’ 등의 구호가 나올 법 한데.

감독이 일부러 웃기게 만드려고 설정을 이렇게 비틀어 놓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영화를 감독(이게 감독 데뷔작이란다)하고 각본을 쓴 크리스 모리스(우리나라에서도 꽤 인기 있었던 영국 시트콤 시리즈인 <IT Crowd>에서 괴짜 회장 역으로 가끔씩 등장하여 우리에게 그리 낯선 인물은 아니다)는 이 각본을 쓰기 위해 3년 동안 사전 조사를 했다고 한다. 안보 전문가에서부터 이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문가들을 인터뷰했고 각본을 쓴 다음에는 무슬림들에게 보여주면서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한다. 어쩌면 우리가 알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테러분자들에 대해서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존 그레이의 <Al Qaeda and What It Means to Be Modern>을 같이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해 갖고 있는 심각한 오해, 바로 이슬람 테러분자들은 시대착오적이고 전근대적(중세적)인 이상을 갖고 움직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라는 생각을 불식시킨다.

존 그레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바로 그 존 그레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으로서, 2008년까지 런던정경대(LSE)에서 유럽사상을 가르치다가 은퇴한 학자로, 지금도 ProspectNew Statesman, 가디언 등에 꾸준히 글을 기고하고 있다.

비록 이 책은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았지만 그의 대표작이자 베스트셀러인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이 책에 대한 나의 촌평)와 <추악한 동맹>이 번역되어 있다. <알 카에다…>는 위의 두 저작에 비해 분량이 100쪽을 겨우 넘길 정도로 적지만 존 그레이의 독특한 사상의 전모를 유감없이 읽을 수 있으며, 또한 위의 저작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은 정치학적 분석도 담고 있어 우리나라에도 꼭 소개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그레이가 주장하는 요지는 이렇다. 알 카에다가 결성된 배경에는 세계화로 인한 국경 없는 (초국적적) 자본의 이동으로 인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중동과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있다. 알카에다는 약화된 국가 권력의 공백을 비집고 들어가 세력을 키워왔으며 위성전화, 인터넷을 비롯한 첨단기기를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조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알 카에다는 사실 그야말로 모더니티의 산물이다!

물론 알카에다가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잘 활용하여 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옛날에 ‘중체서용‘을 부르짖던 양반들처럼 기술은 서구의 최신식을 활용하되, 그 정신은 전적으로 중세적인 이슬람주의에 기반한 것 아닌가? 여기서 이 책의 가장 충격적인 주장이 펼쳐진다. 알카에다의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에게 사상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이드 쿠틉Sayyid Qutb(정확히는 사이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동생 무함마드에 의해 사이드의 사상이 알 카에다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게 된다)의 저작은 현대 서구사회의 영적인 공허를 주로 다루고 있다. 쿠틉이 서구에서 얻어온 것은 그 ‘물질주의의 영적 공허’만은 아니었다. ‘혁명의 전위’가 앞장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쿠틉의 사상은 어디선가 무척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가디언의 한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아나코-이슬람anarcho-Islam‘라 일컬어질 만도 하다.

생시몽과 콩트로부터 비롯한 유토피아 사상과 서구 계몽주의의 계보를 되짚어 나가면서, 그레이는 알 카에다와 볼셰비즘,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모두 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오직 단 하나의, 단일한 관점을 갖는 미래상을 가정하고 이를 위해서는 폭력도 불사하는 이들의 태도가 뉴욕의 쌍둥이 빌딩을 무너뜨리고,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증발시켰으며, 남미와 동구권의 여러 나라들을 빈사 상태로 빠뜨렸다는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추악한 동맹>과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는, 알카에다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빠져 있으나 그레이의 이러한 사상을 잘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시 한번 머리 속의 나침반의 바늘이 휘청거리는 느낌을 경험하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읽어보시길 바란다.

책의 제목만 보면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한 매우 상세한 분석으로 여겨질 테지만 실제로 알 카에다와 이슬람 급진주의에 할애하는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하찮은 인간…>에서부터 이 <알 카에다…>를 거쳐 <추악한 동맹>에 이르기까지, 그레이의 주안점은 논리실증주의, ‘과학적’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으로 대표되는 모더니티의 유토피아적 환상을 가차없이 깨부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이 책은 전지구적 자유시장, 계몽주의의 사상사, 세계화가 바꾸어 놓은 전쟁의 양상, 팍스 아메리카나 등의 광범위한 주제를 종횡무진으로 넘나들어 몇몇 독자들을 혼란스럽게도 한다. 하지만 생시몽 이래로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유토피아 기획을 철거하는 데에 이 정도로 광범위한 접근법이 단순한 선택사항에 지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를 해소하고 나서도 여전히 남는 위화감이 있다. 자폭 테러를 준비하는 남편을 옆에서 되려 미소 띤 얼굴로 응원하는 오마르의 아내와, 자폭을 하게 되면 머리가 천정에 닫기도 전에 천국으로 가게 될 거라며 제 아비에게 환호하듯 말하는 그의 아들. 나로서는 이러한 정념을 곧바로 경건한 신앙심으로 잇는 방법을 모르겠다. 어떻게 이를 잇는다 하더라도 그 선은 곧은 직선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방인, 소수자로서 언제나 손에 한 움큼씩 쥐고 살아온 절망으로 뒤틀린 선일 게다. 온 시간을 다 바쳐도 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리는 없다는 불길한 확신을 갖게 되면, 이제 단 한 번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이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싶다는 절망적인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은 비단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2012년 1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썼던 글을 다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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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올라올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읽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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