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문제: 두 언어 사이의 권력관계

“한국문학 번역의 실패는 한국어에 너무 충실하게 번역해 외국어가 매끄럽지 않은 경우와 외국어 독자들을 지나치게 고려한 나머지 한국어와 한국문학 고유의 특징을 소거해버리는 경우로 크게 나뉜다.”

한강의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상 수상과 함께 주목을 받은 번역자 데버러 스미스의 <채식주의자> 번역에 대한 한국일보 기사의 한 대목이다. 사실 이게 한국문학 번역만의 문제일 리 없다. 그 언어 고유의 문법구조나 그 언어문화권 특유의 용법, 그리고 그 안에서 글쓴이만의 스타일이 반영되는 ‘문체’를 얼마나 잘 반영하느냐가 중요한 문학번역에서는 이런 문제는 언제나 번역자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다.1

번역자의 역량 등의 문제를 제외하면 사실 이러한 문제는 특정 문학(‘한국문학’)에 국한된 게 아닌, 두 언어 사이의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다. 영어 또는 프랑스어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원어에 너무 충실하게 번역해 우리말로 번역된 결과가 매끄럽지 않을 경우’와 ‘(해당) 외국어와 외국문학 고유의 특징을 소거해버리는 경우’ 중 어느 경우가 문제가 될까?

이런 일은 (당연히) 한국어 번역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내 귀에 바벨 피시Is That a Fish in Your Ear?에서 벨로스는 과거 프랑스어 문학 등을 비롯하여 ‘문화적 권위’ 따위가 높은 언어와 그렇지 않은 언어 사이의 번역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항상 있었다고 지적한다.2

나도 이응준 작가의 <국가의 사생활> 초반부를 번역하여 가디언에 보내주고 나서, 가디언에서 편집한 결과물을 보고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긴 했다. 작가가 일부러 길게 풀어쓰면서 아이러니를 극대화시킨 부분을 그냥 매끄럽게 깎아낸 부분도 있고 그랬기 때문.

한국일보의 기사는 작가와 번역가 외에도 편집자의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 내 짧은 견문으로는 영미권 출판계에서는 편집자의 영향도 매우 크다. 전세계에 번역되어 나갈 것을 염두에 두고 문장 자체를 번역하기 쉽게 다시 쓰거나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고. 아마 한강의 소설집 번역에서도 편집자의 역할이 컸을 것인데 그 부분이 (물론 들추기 쉽지 않겠지만) 많이 간과되고 있는 것은 아쉽다.

  1. 혹자는 그런 상황의 고유함 등을 들어 완전한 번역, 특히 시의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런 주장은 내가 예전에 소개했던 the axiom of ineffability에 대한 글로 물리친다. ↩︎
  2. 다시 이야기하지만 내 귀에 바벨 피시는 정말 좋은 책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번역이 잘 되었는지는 번역본을 안 읽어봐서 모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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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올라올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읽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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