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흡인력은 간만이다. 개봉 당일 보고는 그 다음날 다시 봤다. 두 번째 보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영화는 <엔젤 하트>였는데 이는 내가 이런 류의 오컬트 스릴러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확실한) 악마/귀신의 존재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과 토착신앙(부두교와 한국/일본의 무속)이 주는 기묘한 분위기가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곡성이 엔젤 하트와는 달리 성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은 특이하다. ‘모든 영혼은 신 앞에 암컷이다’라는 탄트라 요가의 말도 있고 강력한 영적 존재와의 접촉에서 성은 중요한 에너지원이자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특히 (흥행상의 이유가 더 크겠지만) 자주 묘사되는 편이고.
물론 이 영화에서도 성은 꾸준히 암시되고 있다. 외지인(쿠니무라 준 분)이 첫 희생자를 겁탈하였다는 마을 사람의 이야기라든지, 효진(김환희 분)이 부모의 성생활에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고 외지인과의 접촉 이후 사타구니 주변부터 두드러기가 돋기 시작한다는 점 등. 그렇지만 엔젤 하트에서 에피파니의 (십중팔구 악마와의 성적 접촉에 대한) 놀라운 대사((“내 인생 최고의 씹질이었지라(It was the best fuck I’ve ever had)”))나 천장에서 피가 쏟아지는 섹스신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이는 아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기독교적 모티프는 이 영화의 유일한 ‘맥거핀‘일 것이다. 해외를 의식한 장치인 것 같기도 하다. 오프닝의 자막과 종반부에서만 쓰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영에는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라는 구절은 후반부의 연출에서 외지인과 무명(천우희 분)의 정체에 대한 혼란만 가중시킨다((외지인이 뭔가 도술(?)을 써서 자기를 쫓아오는 전종구(곽도원 분) 패거리를 피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정말 찌질처절하게 벼랑 끝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는 모습은 그도 사실은 ‘살과 뼈’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가도 막판에 동굴에서는 악마의 형상으로 변신하면서 그러한 기대를 또다시 배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악마를 부활시키려는 게 외지인의 목적이며, 효진을 제물로 바쳐서 마침내 성공했다는 해석 또한 일리가 있긴 하다. 한편 무명은 전종구를 도우려는 것 같아 보이는데 종구가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일가족은 효진에 의해 살해당한 후다. 왜 자신의 가족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지느냐는 종구에게는 ‘사람(외지인)을 의심하고 죽이려 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외지인이 먼저 자신의 딸에게 접근하고 기이한 의식을 하려고 했으며 때마침 딸이 아프면서 이상해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보면 외지인을 두둔하는 것 같기도 하는 듯한 발언이다. 종구가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가려고 하자 손을 붙잡는 모습은 그 또한 ‘살과 뼈’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는데 원래 시나리오에는 일광의 차가 무명의 몸을 통과하는 장면이 있다고도 한다. 외지인의 의식을 방해하고 좀비가 된 춘배가 외지인의 거처로 가는 것을 보면 좀비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일광(황정민 분)의 굿 장면과 외지인의 주술 장면의 교차 편집과 후반부의 반전(분명 무명과 외지인의 정체와 본래의 성격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논리적으로도 일관되지 않는다)은 관객들에게도 ‘의심’ 또는 ‘현혹’을 주려는 시도인 것 같은데 연출자라는 주도적인 입장에서 이렇게까지 관객을 의도적으로 흔드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황해> 때부터 이번 영화에 이르기까지 나홍진 감독이 조선족이나 일본인과 같은 국외자를 다루는 방식은 너무나 한국적이라서 나홍진만을 탓할 수만은 없을 정도다. 일광의 실체에 대한 한 가지 복선이 되는 장치가 하필이면 ‘훈도시’라는 것도 그렇다. 그렇지만 곡성은 분명 훌륭한 영화고 나는 조만간 친구와 두어번쯤 다시 극장에서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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