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지나가듯 읽었던 것도 같은데) 페이스북을 통해 故 황현산 선생이 몇년 전에 쓴 학술용어의 운명을 읽었다. 말마따나 ‘학술용어’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보다 폭넓게는 번역 전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기존의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언어권에서 온 학술적·철학적 개념을 번역하는데 얼마나 많은 고민과 사색이 녹아있는지는 황 선생의 이 글보다는 옛날에 읽은 김용옥의 초기 저작 중 하나1의 각주에서 더 잘 알 수 있다. (불교철학의 개념이 한자어로 어떻게 옮겨졌는지2에 대해 읽다보면 이제는 우리에게 그 이름조차도 남겨져 있지 않은 선현들에게 깊은 존경심이 솟아난다.)
번역어와 (이미 고유어에 편입된 번역어를 포함한) 고유어 사이의 그물망에 대한 숙고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황 선생 특유의 세심한 어구를 따라가다가 마지막 단락에서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의식 밑바닥으로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언어는 그 인간의 모국어다. 외국어는 컴퓨터 언어와 같다. (…)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은 도구적 기호에 그치지 않는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예술을 다룬다는 생각에 언어를 신비화하곤 한다. 그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모두에게 각자 신비 하나쯤 있어도 좋다. (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그것이 자신의 마음 속에 관운장 혹은 맥아더 장군 신줏단지마냥 모셔져 있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어야 한다. 다른 이들의 마음 속에는 다른 신위가 숭배받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면 교회 가서 예수에게 큰절하는 촌극만 빚을 터.
‘인간의 의식 밑바닥으로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언어는 그 인간의 모국어다’라는 명제를 일말의 의심도 갖지 않고 쓰는 모습이 내겐 그리 보인다.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고? (The Axiom of Effability에 대한 글 참조)
모국어에 대한 이 이상할 정도의 신비화(그리고 이것이 별다른 이의없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수용된다는 것)는 아마도 한국이 그만치 폐쇄적이었으며 다른 문화와의 교류가 지극히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일일 테다. 모국어는 폴란드어였으며 제2외국어가 프랑스어였고 제3외국어이자 자신의 주요 작품들을 쓴 언어인 영어는 20대 때 구사하기 시작한 조셉 콘래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여러 언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며 살아온 사람들에겐 이런 이야기가 그리 귀에 와닿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의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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