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 파트2는 현대 사회에 대한 계시다 (존 그레이)

Published

심미적 볼거리로서 듄: 파트 2는 숨막힐 정도다. 사막 행성의 빛나는 광경은 줄거리가 흐릿해진 후에도 오랫동안 머릿 속에 남는다. 창백한 푸른 하늘과 함께 아라키스의 이질적인 풍경은 이 행성이 고향인 프레멘 족의 금욕적이며 베두인과 같은 삶을 담는다. 거대한 모래벌레와 광대한 전투 장면은 움직임과 폭력을 더해 영화의 장관을 완성한다.

드니 빌뇌브의 시각적 광시곡에 등장하는, 서로 전쟁을 벌이는 제국과 왕조들은 그 고대성으로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 주변에서 형성되고 있는 세계와 다르지 않은 세계를 보여준다. 진보적 사고의 공리는 과거로의 돌이킬 수 없는 귀환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시한을 다했을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의 체제, 다시 말해 진정한 사회주의, 코스모폴리탄적 평등 공동체 또는 아마도 공정한 전문가가 통치하는 기술관료제로 대체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리버럴 사회는 실패를 겪으며 하이테크 버전의 봉건제도로 변모하고 있다. 듄: 파트 2는 미래의 환영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계시다.

봉건사회는 토지의 소유가 권력 기반이 된 위계 사회였다. 듄에서 권력의 기반은 희귀한 천연자원의 통제권이다. 모래벌레 유충의 진균성 분비물에서 추출된 환각제 스파이스는 사용자의 수명과 정신력을 향상시켜 일부 사용자에게 성간여행을 용이하게 하는 예지력을 제공한다. 사회적 지위는 태어난 카스트에 의해 결정되며, 당신이 할 수 있는 어떤 움직임도 세습 지배 엘리트에게 봉사하게 된다.

우리의 삶의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가상경제는 비물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소비하는 물질 자원의 희소성을 악화시키는 동시에 지구 환경을 손상시킨다. 암호화폐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전기의 상당 부분은 화석연료, 특히 석탄에서 나온다. 클라우드의 탄소 발자국은 항공 산업보다 더 크다고 추정된다. 데이터 서버는 냉각하는 데 물을 사용하며, 이는 물 부족을 악화시킨다. 배터리에 사용되는 광물은 거대한 규모의 채굴을 필요로 한다. 천연자원은 우리의 디지털 경제의 기반이다.

다른 유사점도 있다. 듄의 세계에서 권위는 특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에 기반한다. 성간여행을 독점하는 우주조합이나 초자연적인 투시력을 개발하기 위해 스파이스를 섭취하는 베네제서릿 자매단이 그렇다. 자매단은 예지력을 활용해 우월한 종을 만들어내려고 꾸민다.

신봉건주의 사회 또한 일종의 심오한 지식을 내세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인지 엘리트’들은 사회를 과거의 억압적 구조를 타파하는 길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행히도 우리의 ‘룸펜 인텔리겐치아’들은 중세의 성직자만큼 지적이지 않다.중세 신학은 교차성intersectionality의 밀교적 횡설수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엄격하고 다채로운 학문이었다. 사회과학의 상당 부분은 신빙성 없는 도그마로 구성되어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2008년 대공황을 예측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건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목록에도 없었다. 정치학자들 중에서는 2016년 트럼프의 승리 가능성을 인정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크렘린 연구가들 중 소련의 붕괴나 공산주의 이후의 러시아가 고토회복주의적revanchist 신정교neo-Orthodox제국으로 변신하리란 걸 예상한 이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오늘날 지식계급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들이 세상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이다.

21세기 사회는 그 모든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봉건 문명을 재창조할 수 있는 지적, 문화적 자원이 부족하다. 기술봉건주의의 근본적인 약점은 신화의 빈곤이다. 중세사회는 피안의 낙원을 약속하는 신앙에 의해 결속되었고, 때때로 이로 인해 격렬하게 분열되기도 했다. 농민과 도시 빈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중세 유럽 전역을 휩쓴 천년왕국 운동에서처럼—그들은 신이 예정한 삶의 변화를 재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신봉건주의 사회가 약속하는 빛나는 미래는 그만한 규모의 신도들이 없다.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사회는 기술주도 성장이라는 신조를 전파해 왔다.그런 신조에 사로잡혀 있는 실리콘밸리와 블레어주의 싱크탱크의 주변을 벗어나면 이러한 생각은 죽어가는 신앙에 불과하다. 미래에 자신의 처지가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양성diviersity 책임자나 살아진 경험lived experience 책임자 따위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수많은 졸업생들은 비록 희미하게나마, 영구적인 경제 팽창이라는 우화에 의지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들이 새로운 귀족—어떤 식으로든 국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약탈적 자본가와 금융 엔지니어들—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한, 그들은 산업노동계급을 따라 항구적 해고의 운명을 겪게 될 것이다.

기술봉건주의는 안정된 체제가 아니다. 성장에 대한 생태학적 한계의 강화, 일자리를 파괴하는 AI 같은 기술, 그리고 신빙성 있는 정당화 신화의 부재는 언제든 폭발하기 쉬운 조합을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시스템이 붕괴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사회의 모순은 어떤 새로운 질서를 낳을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드니 빌뇌브가 시사하듯, 끊임없는 투쟁이 현실이다. 그의 영화의 찬란함은 출구를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끝없는 갈등을 아름다운 것으로 변모시킨다는 점이다.

원문: https://www.newstatesman.com/comment/2024/03/dune-part-two-our-own-world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