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경력 이발 기능장의 찰스 바버샵

즐겨찾던 바버샵의 바버가 그곳을 떠났더군요. 이제 앞으론 어딜 가야하나 단골 맥주집 사장님과 논의(?)를 하다가 오랜 경력의 이발사가 최근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바버샵을 오픈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그곳이 어딘지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홍대 근방에 바버샵이 한둘이 아닌지라… 게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원장님이 블로그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 잘 모르셔서 쉽게 검색이 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겨우 찾아낸 블로그는 충분한 정보를 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발의 전 과정을 가위로만 한다는 설명을 읽고는 예약을 결심했습니다. 군 생활 때 기지의 간부 이발소에서 근무하시던 이발사 분도 바리깡을 쓰지 않고 가위로만 이발을 하셨는데 갈 때마다 항상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는 바리깡 따위 쓰지 않죠.

옆머리가 쉽게 뻗치는 특성 때문에 언더컷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이라 모든 과정을 가위로 시작하고 끝내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발하고 머리 감고 스타일링까지 하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던 것 같습니다. 덕택에 원장님과 이런 저런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이분 스토리가 아주 재밌습니다.

가위날 갈기 등등의 허드렛일부터 하면서 이발을 배웠고, 20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발을 시작하면서 많은 정치인, 유명인, 재계 인사들의 머리를 하셨다고 합니다. 정일권, 신현확 총리의 이발도 하셨다고 하니 이분의 이발 역사가 얼마나 긴지 실감이 옵니다. 이분이 이발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만 엮어도 대한민국 현대사가 나올 듯합니다.

어떤 중학교 동창 사진: 앞줄에 앉은 이가 정일권, 뒷줄 왼쪽부터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어떤 중학교 동창 사진: 앞줄에 앉은 이가 정일권, 뒷줄 왼쪽부터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좀 ㅎㄷㄷ 하죠.

정·재계 인사들의 이발도 많이 하셨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홍정욱 전 의원이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왔다 갔다고 하더군요. 과거에는 그밖에도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나 삼양 김윤 회장 등등… 많은 이름들을 들었는데 다 기억은 나지가 않네요.

이발기능장이 다섯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시절에 기능장이 되었고 그 이후로 자격시험 출제위원 등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선배 이발사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셨고 이제는 당신 정도만 남은 것 같다고. 때문에 “요즘 젊은 친구들은 한두 가지 정도만 배워놓고서는 그게 (이발의) 전부인 양 한다” 같은 쓴소리도 달콤하게만 들립니다.

조선호텔에서 20년을 일하고는 다른 호텔 등을 거쳤다가 신라호텔에서 4~5년 간 일을 하셨는데 신라호텔이 내부 리모델링을 하게 되면서 더 일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친동생을 비롯한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들의 권유로 이참에 아예 미국에 가서 바버샵을 할 결심을 했다고 해요. 비행기표까지 구입했는데 예전 고객들과 안부(및 작별) 전화를 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급전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단골 손님께서 이제 미국으로 가버리면 누구에게 이발을 받느냐며, 홍대에서 바버샵을 열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고 해요. 그분이 바로 홍대입구역 8번 출구와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빌딩의 건물주였다고. 마지못해 그분을 만나고 홍대 주변을 돌아보면서 젊은이들로 붐비는 것을 보고 이정도면 한번 해볼만 하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그리하여 오픈한지 이제 3개월 째. 그런데 벌써부터 입소문이 많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셜미디어 등을 통한 홍보 같은 건은 전혀 모르는 분이시라 처음에는 며느리가 인터넷에 올라오는 문의글에 답을 해주는 식으로 운영을 했고, 지금은 예약 등을 접수하시는 분께서 블로그 운영도 같이 하고 계십니다.

과거에는 이발소가 퇴폐영업 등과 연관되고 ‘(멋과는 하등의 연관이 없는) 아저씨들만 가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하향세였는데 근래 수년 사이에 갑자기 ‘바버샵’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쪽에 샵을 내길 참 잘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미국행을 결심하면서도 가장 걱정되었던 것이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의료비였는데, 당신의 동생도 미국 시민권자이면서도 몸이 안 좋으면 한국에 와서 수술 등의 진료를 받곤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면서요.

샵의 인테리어나 소셜미디어 운영과 같은, 요즘에는 다들 하고 있는 부분은 좀 부족했지만 (언제 기회가 되면 소셜미디어 운영에 대해서 좀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본이 경륜으로 탄탄히 뒷받침되어 있어서 앞으로도 이발은 여기서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벌써 블로그에 제 사진도 올라왔네요, 허허.

앞으로도 이런 전통을 잇는 젊은 '장인'들이 꾸준히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전통을 잇는 젊은 ‘장인’들이 꾸준히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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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올라올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읽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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