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바흐가 2015년 평양 공연 일정을 발표하면서 북한에서 공연한 최초의 록 밴드가 됐을 때 (나를 비롯한) 팬들은 그 절묘함에 쾌재를 불렀다. 세계 최고의 전체주의 국가, 북한만큼 라이바흐가 공연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또 어디 있을까.
슬라보예 지젝도 같은 생각이었다:
[quote]라이바흐의 북한 공연은 21세기의 가장 매혹적인 문화적, 이념적, 정치적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세계는 서로 공명한다…[/quote]
대체 라이바흐가 어떤 밴드이길래 지젝이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걸까? 라이바흐가 평양 공연을 마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리버레이션 데이’를 보면 가늠할 수 있다.
[quote]언덕은 음악의 소리로 살아 숨쉬네
천 년 동안 불러온 노래와 함께
언덕은 음악의 소리로 내 마음을 채우네
내 마음은 들려오는 모든 노래를 부르려 하네[/quote] ‘리버레이션 데이’는 라이바흐의 ‘사운드 오브 뮤직’ 커버곡의 뮤직비디오로 시작한다. 원작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아름다운 알프스 언덕 대신 한국전쟁 당시의 기록영화로 화면이 가득 채워지자 ‘사운드 오브 뮤직’의 노랫말이 갖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언덕’은 국군과 인민군이 벌이던 고지전의 배경이 되고, ‘음악의 소리’는 포격의 굉음과 전장의 함성이 된다.
전형적인 라이바흐의 방식이다. 라이바흐는 오래 전부터 노랫말이 위치한 맥락을 바꾸어 그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방식의 커버를 즐겨 사용해왔다.
1980년 구 유고슬라비아(현 슬로베니아)에서 결성된 이 밴드에게 세계적인 인지도를 부여한 두 곡, 오퍼스의 Live Is Life와 퀸의 One Vision의 커버가 대표적이다. 음악의 분위기를 군국주의적으로 바꾸고 노랫말을 독일어로 번안한 것만으로 라이바흐는 원곡들의 ‘모두 하나가 되자’는 메시지가 얼마나 쉽게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늘 논란을 불러 일으킨 라이바흐의 독특한 ‘패러디’ 방식의 특징은,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패러디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철저하게 패러디만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전체주의의 신봉자인 것인지 아니면 비판을 위한 패러디인지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지젝은 위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quote]라이바흐는 단순히 전체주의를 비웃는 것이 아니다. 라이바흐는 모든 사회에, 심지어 가장 민주적인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전체주의적 면모를 드러낸다.[/quote] 그래서 라이바흐는 극좌와 극우 모두로부터 비난과 찬양을 동시에 받는 독특한 문화 아이콘이 됐다. 과거 영국에서 첫 공연을 가졌을 때는 극좌파 팬과 극우파 팬들이 모두 공연장에 모였다가 싸우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을 정도.
노르웨이 출신으로 이전부터 북한과 여러 차례 문화교류를 해온 모르텐 트라비크가 아니었다면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 다큐멘터리의 공동감독이자 라이바흐의 평양 공연을 기획한 트라비크는 2014년 라이바흐의 뮤직비디오를 감독하면서 밴드와 인연을 맺었고, 이듬해 라이바흐의 평양 공연을 추진했다.
문화계에서 논쟁을 몰고 다녔던 라이바흐의 공연을 국제정치에서 늘 문제거리인 북한에서 치르는 일은 물론 쉽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음을 느낄 수 있다. 검열 담당 관료들이 사사건건 개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북한의 낡은 무대 기술 때문에 라이바흐와 스탭들은 끊임없이 타협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라비크와 라트비아 출신의 감독 우기스 올테는 어찌 보면 위험한 시도인 라이바흐의 북한 공연 과정을 상당히 유쾌하게 그려냈다. 아마도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껏 나온 모든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 중에서 가장 많이 웃으면서 볼 수 있는 것이리라.
‘리버레이션 데이’가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초연을 가지면서 감독과 밴드가 지난 5월 1일 전주를 방문했다. 다큐멘터리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라이바흐는 곧바로 무대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라이바흐는 이렇게 알게모르게 한반도의 북녘과 남녘에서 모두 공연을 가진 전무후무한 밴드가 됐다.
이날 공연이 끝나고 밴드 인터뷰를 위해 기다리다가 라이바흐 공연을 보기 위해 일본에서 전주까지 온 팬을 만났다. 놀랍게도 라이바흐는 여태껏 일본에서 공연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Einstürzende Neubauten은 일본에서 아예 비디오도 찍었을 정도였는데… 의외였다.
무대가 이상적인 상태는 아니었기에 공연이 어떨지 걱정이 됐는데 역시 공연 하루이틀한 양반들이 아니라서 달랐다. 특히 배경 영상과 조명의 사용은 정말 업계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라이바흐가 평양에서 부르지 못했던 ‘가리라 백두산으로’를 전주에서는 들을 수 있었다. 모란봉악단의 히트곡을 커버한 이 곡은 정작 평양에서는 원곡을 심하게 바꿨다는 이유로 공연 직전에 세트 리스트에서 빠졌다.
공연의 대미는 물론 Life Is Life가 장식했다. 앨범 수록 버전보다 후반에 훨씬 과격하게 흐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배경에 도끼로 엮은 스와스티카가 회전하는 걸 봤을 때는 잠시 아연했지만.
아마도 라이바흐가 남한에 와서 공연하는 것은 지난 5월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테다. 그걸 놓치지 않아 참 다행이었다.
[note note_color=”#f3f3ef”]본래는 이 다큐멘터리와 공연에 대한 기사를 밴드 멤버 및 감독 인터뷰와 함께 허프포스트에 실을 계획이었는데 내가 BBC로 이직을 하는 바람에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못내 아쉬움을 갖고 있다가 일단 내가 갖고 있는 공연 영상만이라도 덧붙여 내 블로그에나마 올린다.[/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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