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륭을 다시 떠올리다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 우연한 기회로[footnote]당시 전시 준비를 돕고 있던 교수가 알고보니 선생의 따님이었다.[/footnote] 김병익 선생[footnote]당시 아르코 위원장이었다.[/footnote]을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김병익하면 문지이고, 문지하면 (내겐) 박상륭이었으므로 나는 문지에서 나온 책들 중 박상륭 선생의 소설을 가장 열심히 읽었다고 말을 했는데 그의 반응은 당시의 나에겐 의외였다: ‹죽음의 한 연구›는 단연 뛰어난 소설이었지만 그 이후에 나온 ‹칠조어론› 같은 것은  사기성이 짙다.

나는 내심 당혹했지만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기에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footnote]내가 음악을 많이 듣는다는 이야기를 했더니(그때 교수의 작업을 돕고 있던 것도 내가 무슨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따위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월드뮤직을 듣고 있다며 Makeba 얘기를 했다.[/footnote]

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는 박상륭을 만난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그 이전에도 그 이야기를 해볼까, 어떻게 생각을 할까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게 결국 다른 사람이 한 이야기를, 그것도 당사자에게 옮기는 거라 주저했던 것인데 세월이 꽤나 흘렀기 때문에(지금 계산해 보니 적어도 5년 정도 지났다), 그리고 나중에는 들어볼 기회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실례를 범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두어 차례 박상륭을 보았던 바, 벌써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는 청년 및 아재들에게도 그저 허허 웃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분명 젊을 적에는 매우 자신만만하고 싸움붙기를 주저하지 않는 불 같은 성격이었다고 들었는데 세월도 흐르고 병마와도 싸우다 보니 그런 기운이 많이 누그러지지 않았겠는가 생각했다.

하지만 박상륭의 반응도 의외였다:

그 사람에게는 내 소설을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이 없습니다.

어조에 큰 격앙은 없었지만 표현과 의미는 분명했다.

그 다음에 선생이 직접 덧붙였던 말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듣고 했던 말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죽음의 한 연구›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도 김현 때문이지 그가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고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아니 제아무리 김현이라도 김현의 평가는 김현의 것이지 왜 다른 평가를 말하지 못하나.

그로부터 또 몇년이 지난 후, 소위 ‘문단’이라는 게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좀 주워듣고 알게 된 후에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 그러니까, 그 종종 ‘주례사 비평’이라고 말하는, 그리고 (업계용어로) ‘표4‘에 들어가는 추천사란 그 내용보단 누가 썼느냐가 중요하고 그것이 ‘강호’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내려주는 공인된 신용장 같은 거란다.

김현이 박상륭을 무척 좋아하긴 했나 보다. 일산으로 옮겼던 박상륭의 한국 거처에서 김현이 오마르 카이얌의 글귀를 써 보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김현은 박상륭에게 語佛이란 호(?)를 주었다고 한다

그보다 더 옛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처음이었나 두 번째로 뵈었던 자리였다. 뒤늦게 서울대 국문학과인지 하여튼 서울대 애들이 몇명 합류했다. 그런데 말하는 꼬락서니로 봐서는 박상륭의 소설을 잘 읽어본 것 같진 않았고 그저 어떤 선배가 훌륭한 분 모신 자리에 있으니 와봐라 해서 온 것 같았다.

선생은 대화가 오가는 중에 그중 하나에게 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서울대 애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도킨스 류의 뻔한 대답을 하자 싸늘하게 웃으며 ‘그렇게 생각합니까?’라고 반문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마 선생 젊을 적에는 더했겠지.

거의 말이 없던(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에겐 놀랍겠지만 그 시절 나는 그랬다) 나는 딱 한번 거기서 선생에게 질문을 했다. 해탈이건 초극이건 그런 걸 달성하려면 결국 말의 요가로는 한계에 달하지 않는지. 정신의 요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선생은 내게 무어라 답을 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내 논지에 빗나가는 대답이기 때문이었는지, 도무지 그때 무어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퍼스트맨’을 보고나니 계속 떠올라 ‘인터스텔라’를 다시 보고 다시 감동한 후 자려 했다가 작년에 선생에 대해 쓴 글에 댓글이 달린 걸 보고 불현듯 다시 선생에 대해 뭐라도 끄적여놓고 싶어 쓰다.)

일산에 있던 선생의 책상, 2012년 5월 26일
선생과 함께, 2012년 5월 26일

(피처 이미지는 선생이 즐겨 피우던 담배와 파이프, 2012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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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올라올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읽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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