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에 처음으로 도착해서 지도를 보는데 뜬금없는 ‘조기역사관’이라는 게 보인다. 연평도와 조기가 뭔 상관일까 싶어서 처음엔 弔旗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생선이었다.
연평도에 2010년 11월의 피격 사건 말고 다른 것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알고보니 연평도는 한때 한반도 일대에서 최대의 조기 어장이 있던 곳이었다.
한때는 연평도가 전국 최대의 조기잡이 어장으로 전국의 어부들이 모여들었다는 게다. ‘조기파시’란 그렇게 바다에 형성된 시장을 가리키는 말인데 조기역사관의 설명으로는 1968년까지 계속됐다 한다.
미 영사관에서 찍었다고 하는 사진이 역사관에 걸려있는데 어선들이 포구에 잔뜩 몰려있는 모습으로 가히 장관이었다. 지금 이 사진에 나온 곳이 내가 지금 둘러보고 있는 연평도가 맞나 싶을 정도.
지금은 주민 대부분이 생활고를 겪고 있고 정부에서 제공하는 공공근로 일자리들로 겨우 버티고 있지만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연평도는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던 것 같다.
인천시와 국립민속박물관이 올해 발간한 연평도민속조사 보고서에서는 당시에 대해 사람들이 하던 이야기들을 수집했다.
- 화장실에 종이가 없으면 돈으로 닦았다
- 잘 때 돈주머니를 베고 잤다
-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
- 개가 조기를 물고 다녔다
- 연평파시 때에는 개대가리 앞에도 이팝(쌀밥)을 올린다
- 아이들도 조기를 들고 다니며 빵을 바꿔 먹었다
- 어부는 조기떼를 따르고 술집 아가씨들은 어부떼를 따른다
- 사흘 벌어 한 달 먹고 한 달 벌어 1년 먹는다
- 연평도 어업조합의 일일출납고가 한국은행 일일출납고보다도 액수가 훨씬 많았다
취재하면서 만난 어민 한 분은 당신이 어릴 적을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뻘에 나가면 조기를 제외한 나머지 생선은 다 버렸어 뻘에다가. 그러니까 우리 어릴 적에 뻘에 나가서 보면 넙치고 서대고 꽃게고 여러 가지 생선이 팔딱 뛰어다녔어, 버렸어. 배에서 버려가지고… 골라다가 먹던 게 우리 다섯 살 때 였거든. (…) 조기파시 때 술집들이 많았잖아. 기생들이… 바닷가에 손님따라 누워서 잠들 자는 모습들이 포착이 되고…
연평도에 머무르는 사흘 동안 정말 할 게 별로 없어서 조기역사관만 세 번을 갔다. 사진들을 보면서 그때의 영화를 상상하니 묘한 쓸쓸함이 들었다. 칠레의 발파라이소나 페루 아마존의 이키토스를 보면서 든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발파라이소나 이키토스에 비해 연평도는 지금의 행색이 훨씬 초라하다. 그래도 발포나 이키토스는 그때의 영화를 짐작케 하는 건물들이라도 남아있지만 연평도는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4~5월 조기철에만 북적이다가 빠져나가는 식으로 반복이 되어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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