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윌슨, 「오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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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윌슨은 이미 「아웃사이더」에서 인간 정신의 새로운 발달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책의 후반에서 구르지에프가 상당한 비중으로 언급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윌슨이 나중에 오컬트에 대한 책을 썼다는 것도 고등학생 시절 열심히 읽던 범우사판 아웃사이더의 (나중에 윌슨이 새로 쓴) 저자 서문에서 알 수 있었다. 아웃사이더로 인한 급작스런 성공 이후 평단의 혹평을 면하지 못하다가 1971년 오컬트를 펴낸 후 다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니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웃사이더가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였(었다고 으르신들이 그러더라)기 때문에 대학 도서관에서 윌슨의 다른 책들을 꽤 많이 찾을 수 있었는데 도무지 오컬트에 대한 책은 찾을 수 없었다(심지어 ‘세계 살인 백과’ 같은 책도 나왔는데…). 한참이 흘러 전자책이 널리 보급되는 시대가 왔어도 이상하게 윌슨의 다른 책 중에서 오컬트만큼은 전자책이 나오질 않더라.

그렇게 잊고 있었다가 3년 전 런던의 유명 오컬트 서점 왓킨스를 찾았다가 서가에서 페이퍼백을 발견하고는 왜 지금까지 한국에 번역이 안됐는지를 바로 깨달았다. 800페이지가 넘는 책이었다.

분량에 처음 놀랐고 그 다음에는 목차를 보고 놀랐다. 선사 시대부터 시작해서 아그리파, 칼리오스트로, 크롤리까지 이어지는 마법의 역사에, 나처럼 젠체하는 오컬트 독자들은 가급적 회피하는 폴터가이스트, 심령술 같은 사안들도 모조리 포괄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모두 다루면서도 (젠체하는 것으로는 세계 최고일) 영국 평단의 인정을 받았단 거지? 역시 70년대는 달랐던 건가?

아마도 800페이지 전체를 꾸준히 관통하는 분명한 목적의식과 저자의 건강한 회의주의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오컬트’라는 어휘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진지한 식자가 다룰 대상과는 거리가 멀다.1나는 옛날에 싸이월드 마법 오컬트 클럽에 들어가보고 나의 확신을 굳혔다. 하지만 윌슨은 서두에서부터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전혀 숨기지 않는다(숨길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인간이 번민에 시달리게 된 계기를 하나로 뭉뚱그리자면 아마도 ‘자의식’의 발현일 것이고, 유난히 번민하는 예외적 인간들의 문제를 다각도로 조명한 것이 아웃사이더였다면 그 이후 윌슨의 픽션, 논픽션들은 모두 의식을 고양시켜 (주로 사람을 침잠시키는) 이 번민을 탈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룬다. 윌슨은 이를 Faculty X2예전부터 적절한 번역어가 무엇일까 고민했는데 ‘미지의 능력’이나 ‘미지력’ 정도가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라고 이른다.

윌슨은 이를 위해 투시력부터 다우징, 심령술까지 오컬트의 거의 모든 분야를 살펴보는데 그러면서 나름대로 이러한 현상 또는 능력들에 대해 체계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한다. 물론 이는 SPR이나 T. C. Lethbridge 같은 이들의 선행연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그럼에도 매우 대담한 기획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 하나는 인간의 일반적인 의식을 가시광선의 스펙트럼에 견주었을 때, 투시력이나 예지력 같은 능력은 적외선의 범주에 놓고 치유력이나 패컬티X 같은 것은 자외선의 범주에 둔다는 것이다. 잣대는 단순하다. 동물들에게서 흔히 관찰될 수 있으며, 자의식을 갖기 전 선사 시대의 인간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지는 능력이 적외선에 해당되며 현재의 인간 의식 수준을 넘어서는 쪽은 자외선에 비견하는 것이다.

윌슨의 자칭 ‘신실존주의’는 존 그레이가 틈만 나면 비판하는 인간의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하는 현대 이데올로기를 가장 노골적으로 설파한다. 단세포에서 시작돼 인간 의식까지 이르는 진화의 여정에는 단 하나는 아닐지라도 일정한 텔로스가 존재하고,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하는 민족중흥의 버나드 쇼의 ‘창조적 진화’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3국민교육헌장 참조. (그레이의 시각을 빌자면) 윌슨과 다른 이데올로그들의 유일한 차이는 윌슨은 자신이 무엇을 설파하는지 매우 잘 인식하고 있다는 정도.

하루는 콜린 윌슨을 읽고 다음날은 존 그레이를 읽는 미친 독서를 계속하면서 나는 내 생각의 가닥을 잡아보려 했다. 자칭 회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컬트적 현상이 실존한다는 증거는 꽤 탄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컬티스트들이 주장하는 바가 모두 설득력을 얻는 것은 아니다. 윌슨은 교령회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던 양반의 흥미로운 한 마디를 인용한다. “유일하게 하나 확실한 것은… 심령들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벌써 9년 전 일이지만 나 자신이 예술과 오컬트에 대한 책을 준비하기도 했었고 두 분야의 연계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 왔기 때문에 나는 윌슨의 이야기에 귀가 더 팔랑거린다. 하지만 유일한 텔로스 따위라든지 생명의 적자嫡子로서의 인류 같은 관념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 중대장은 나는 이미 여러 차례 나를 비롯한 인간들에게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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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옛날에 싸이월드 마법 오컬트 클럽에 들어가보고 나의 확신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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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부터 적절한 번역어가 무엇일까 고민했는데 ‘미지의 능력’이나 ‘미지력’ 정도가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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