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문제는 늘 인간의 골머리를 앓게 만들어 왔기 때문에 별의별 해설이 다 있어 왔다.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면 거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근래 들어서까지 종종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종의 차원에서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늙은 세대가 물러나야 젊은 세대에게 기회가 생긴다는 류의 세대론(?)적 버전도 있고…
이런 류의 해석은 진화심리학 등의 학문이 가진 한계를 못 벗어난다. 파편처럼 흩어진 점들을 연결하는 것은 오직 연구자의 의도 뿐이다. 인과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연관만 짓는 것이라 입증이 가능하지도 않다. 아무래도 ‘과학’이라고 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그런데 ‘아더 마인즈’를 번역하면서 죽음에 대한 진화론적 해설을 읽고 깜짝 놀랐다. 죽음의 문제를 훨씬 과학적(오캄의 면도날을 들이대도 그다지 생채기 날 부분이 없다)이면서도 명료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었다:
- 생명체의 노화와 그로 인한 죽음은 진화 과정에서 우연히 생겨난 부작용이다
- 단세포 생물에게는 노화나 죽음이란 게 없다
- 하지만 그 부작용이 ‘언제’ 작동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 만약 부작용이 작동하는 시점이 오기 전에 해당 개체가 포식자에 의해 죽는 경우가 잦다면 이에 대해 진화의 선택압이 작용하긴 어렵다
- 다시 말해 만약 10년 후에 노화가 진행돼 죽는 부작용이 있으나 이 종의 개체들은 포식자들이 주변에 너무 많아 2년 안에 잡아먹히는 경우가 많다면, 이런 특질을 가진 개체가 자연도태되긴 어려워진다
- 결국 ‘노화’로 인한 종의 평균 수명은 해당 종이 얼마나 포식 위협에 노출돼 있는지와 연관을 갖게 된다
- 포식자의 위협이 별로 없는 코끼리 등의 종은 자연스럽게 ‘노화’가 더딘 특질의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퍼트릴 수 있다
- (위의 예시처럼) 항시 포식자의 위협에 시달리는 종은 결국 평균 수명이 2년 정도까지 짧아지는 정도로 진화하게 될 수 있다. 평균 수명이 1년 정도 밖에 안되는 특질의 개체는 도태되겠지만 어차피 포식자들에게 2년 내에 죽는 경우가 많다면 수명이 2년 밖에 안되더라도 도태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 ‘아더 마인즈’에서 다루는 문어 등의 두족류가 대표적인 사례로, 두족류는 그 높은 지능에도 불구하고 평균 수명이 2~3년에 불과하다
- 그런데 이는 얕은 바다에서 사는 두족류들의 경우고 심해에 살고 있어 포식 위협이 덜한 두족류들은 10~15년까지도 산다고 한다
(나를 심지어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이 이론이 메더워에 의해 50년대에 기초가 세워졌고 윌리엄스가 60년대에 거의 완성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럼 대체 왜 아직까지도 죽음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제일 먼저 접하는 설명이 이게 아니란 말인가?!)
이 논리를 따라가면 결국 죽음(보다 정확히는 노화)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진화의 부작용일 따름이다.
예전에 피터 틸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그가 스탠포드에서 자신의 수업 시간에 이런 말을 했다고 읽은 기억이 있다:
너의 정신은 소프트웨어다. 프로그램하라.
너의 몸은 껍데기다. 바꿔라.
죽음은 질병이다. 치료하라.
멸종이 오고있다. 싸워라.1
피터 틸은 장수와 불사에 대한 연구에도 투자를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리콘 밸리의 불사에 대한 집착에 대한 대부분의 언론 기사들은 이를 마치 통일 후에 진시황이 불로초에 집착하는 모습처럼 묘사하곤 했다.
이런 관점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필연적인, 심지어는 필요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것은 찬탄할 만하겠지만 필연적인, 필요한 것에 도전하는 것은 그냥 풍차에 돌진하는 라만차의 기사 꼴인 게다.
하지만 최대한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이, 생명이 죽어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문득 ‘사람이 죽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일갈하시며 사시다 신도 살인 암매장 교사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는 이적을 보이시고는 상고심 계류 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신 이긴자 정도령님이 떠오르지만…)
죽음이란 ‘질병’을 ‘치료’하려는 노력이 조소나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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