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보수당은 브렉시트 이후 인권법 개정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인데 존 그레이가 얼마 전에 아예 인권법을 폐기하자는 주장의 글을 썼다: https://unherd.com/2020/03/lets-scrap-the-human-rights-act
내가 영국 내부의 정황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니 거기에 대해 더 할 말은 없지만 그레이가 인권법이 아예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흥미로웠다.
인권법을 근거로 제기되는 소송들이 결국 ‘정치’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사법’으로 해결하게 만들고, 결국 소수의 법관들이 정치적 문제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내리게 된다는 게다.
이는 대화와 합의가 아닌 소수 엘리트의 판단에 정치의 중요 사안을 맡긴다는 것 때문에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이라고 그레이는 말한다.
한국에서도 정치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사법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경향은 뚜렷하고 (이게 원래도 그랬는지 점점 심해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최고의 정치 판단 기구가 아닌가! 행정수도 문제에 대한 판단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등등…) 문재인 정권 들어서는 심지어 판사들이 곧바로 정치에 뛰어드는 전례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영국과 한국의 맥락은 영국의 사정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크게 다르지만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 대신 ‘법원’이라는 (보다 상위의 권위처럼 여겨지는) 기구에 일도양단을 요구하는 경향은 의외로 공통적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레이는 작년 6월에 쓴 글에서는 숫제 ‘인권의 반자유적 제국illiberal empire of rights‘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https://unherd.com/2019/06/our-illiberal-empire-of-rights
이 글에서 그레이는 영국 대법관을 역임했던 조너선 섬션의 2019년 BBC 리스 특강1의 내용을 언급한다.
섬션의 강좌 요지도(아직 다 듣진 못했다) 그레이의 지적과 비슷한 것 같다. 일단 제목부터가 ‘확장하는 법의 제국Law’s expanding empire‘이다.
그런데 그레이는 섬션이 자유주의가 어떻게 과거의 ‘관용의 철학’에서 모두에게 동일한 가치를 강제하는 억압적인 철학으로 변모했는지를 포착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레이가 한국의 상황과 관련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또다른 부분은 포퓰리즘의 발흥이 이런 ‘정치 공간’의 상실과 연관돼 있다는 진단이었다:
포퓰리즘을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중에서 내게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은 바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에서 특정 사안들을 제거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이민에 대해 오직 단 하나의 시각만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수용가능하다고 여겨지면 해당 사안은 사실상 공중의 논의에서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선동꾼을 위한 공간이 생겨난다.
John Gray, Our illiberal empire of rights
- BBC 초대 사장이자 BBC를 지금의 반열에 올려놓은 존 리스를 기념한 것. BBC는 뭐만 있으면 일단 리스의 이름을 붙여놓는다. BBC 공식 폰트 이름도 리스고 BBC 내부망 이름도 리스 네트워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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