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펜스21+> 10월호에 실은 인터뷰입니다.
한동안 개성공단의 가동이 중단되면서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듯 보였던 남북관계는 공단의 재가동 협상이 재개되면서 활기를 다시 되찾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북관계의 본격적인 진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디펜스21플러스>는 최근 ‘의지만 있다면 10년 내에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이룩할 수 있다’는 내용의 신간을 발표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현 민주당 상임고문)을 만나 통일부 장관으로서의 경험과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의견, 그리고 남북통일에 대한 그의 비전을 들어보았다. 정동영 전 장관과의 인터뷰는 지난 9월 4일, 여의도에 위치한 사단법인 ‘대륙으로 가는 길‘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 최근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여행을 하였다고 들었다. 본격적인 인터뷰 시작에 앞서서 여행의 소감을 듣고 싶다.
대륙으로는 러시아, 중국, 바다로는 일본과 태평양 세력인 미국까지, 우리나라는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나라이다. 그래서 외교를 잘해야 살아남는다. 나는 우리 지도자들이 시베리아 철도를 타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시야가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사면에서 한 면이 닫혀 있으니까 지리적으로만 닫혀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들의 시야 또한 닫혀 있는 것이 문제다. 전체를 잘 조망하지 못한다.
사실 만주나 시베리아는 우리나라의 앞마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휴전선이 국경선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지만 한반도의 국경선은 러시아와도 닿아 있다. 북쪽의 국경 1,350km 중에 24km가 러시아 국경이다. 한반도를 철도로 연결시킨 다음 이를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와 연결시키면 화물을 부산이나 광양, 목포에서 유럽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68년 동안 북쪽이 막혀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집에서도 앞마당이 트여 있어야 이웃으로도 나가고 하는데, 앞마당이 막혀 있어 바다를 건너서 갈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우리가 심지어 평양을 갈 때에도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경유하여 돌아가야 하는 판국이다.
‘대륙으로 가는 길’이란 사단법인을 창립한 것에도 그런 의미가 있다. 그런 세상을 위해서 연구활동과 답사활동도 하고, 토론회도 조직하고 있다.
▶ 새로운 저작이 곧 발표된다고 들었다.
다음주 쯤에 <정동영의 10년 후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나올 예정이다. 제목이 약간 생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의지와 비전을 갖고 있다면 10년이면 충분히 사실상의 통일 상태로 갈 수 있다는 내용이다. 개성공단 모델의 확장을 그 수단으로 제시했다. 남북이 공존상태로 가는 데 장애물이 바로 핵문제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9.19 평화체제를 제시하고 있다. 개성공단과 9.19 공동성명은 내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위원장과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나름대로 열정을 갖고 노력했던 것들이다. 당시의 뒷이야기 등을 담았다.
10년 후 통일로 가는 두 개의 바퀴가 개성공단과 9.19 평화체제다. 개성공단으로 남북간의 경제적인 협력을 증진시켜 남북 경제통합이라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이고, 9.19 공동성명이라는 다른 바퀴를 통해서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냉전 체제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하여 10년 후에 통일로 가자는 것이 골자이다.
남북문제를 정략적으로 활용해서는 안돼
▶ ‘인사로 까먹은 것을 대북정책으로 만회했다’는 것이 박근혜 정부에 대한 세평이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적인 지지가 높다는 이야기이다.
나도 조금은 당혹스럽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대북 정책이 자꾸 뒷걸음질 쳤기 때문에 그런 상대적인 측면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한 측면에서 보면 한국형 아베 효과라는 생각도 한다. 아베는 실각을 했다가 북한 때리기 등의 행동으로 일본 우파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면서 재기할 수 있었다. 그런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반북 정서를 바탕으로 대중 정서에 영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문제, 남북문제는 국내의 정파적 이익에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같은 해에 분단된 두 나라 중 독일은 어찌하여 23년 전에 통일을 이루었고 우리나라는 아직도 68년째 분단을 유지하고 있는가? 내외부적으로 다양한 요인이 있을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다. 이 땅의 정치지도자들이 분단문제를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재창출에 끊임없이 활용해왔기 때문이다. 아데나워, 브란트, 슈미트, 콜 등으로 이어지는 독일의 어떠한 지도자들도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동서독 문제를 이용하지 않았다.
분단 68년 동안 민주정부 10년 만이 그 예외였다. 분단을 어떻게 넘겠는가 하는 그런 고민과 정책이 있던 시기였다. 그때 말고는 분단문제는 언제나 지도자들의 권력유지 재창출을 위한 하위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잘하고 있다고 보는 대중적 이미지의 뿌리에는 현 정권이 남북문제에 정략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인 것도 있다고 본다.
▶ 남북분단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좀 더 부연이 필요할 듯싶다.
개성공단 사건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이 몇 개 있다. 개성에 있었던 직원들에게는 별다른 신변 위협이 없었다. 식량이 부족하다고 했던 말도 사실이 아니었다. 이를 과장하여 남북 치킨 게임의 도구로 쓴 것이 아닌가. 대북 정책은 왜 필요한가?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정부의 존재 이유가 북에 본때를 보여주고 길들이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는가.
4월 이후에 우리 정부에게서는 기업에 대한 배려를 찾을 수가 없다. 개성공단에 투자한 기업과 거기에 종사하는 직원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개성에 있는 업체들은 거의 대부분 흑자를 내고 있는 기업들이다. 협력업체들까지 따져보면 6천 개가 넘는 영세 기업들이고 따라서 6~7만 명의 생계가 걸린 문제다. 그런 부분에 대한 고려는 일절 없었던 것 같아 안타깝다. 이는 국민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 과거 정권에서도 분단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사례가 있었나?
68년의 분단 역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합의는 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기본합의서는 그 수명이 10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100회가 넘는 각급 회담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얼어붙었다. 남북간 긴장과 안보 불안이 조성되는 것이 여당 후보의 당선에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정보기관과 보수세력이 합작하여 기본합의서를 찢어버린 것이다. 그들에게는 분단을 끝내는 것보다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이 더 큰 가치였던 것이다.
노태우 정부 5년은 88년에서 시작해서 92년에 끝났다. 이 기간은 세계사적인 구조가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옮아가던 시기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소련이 해체되었다. 한반도에서는 한국과 소련, 한국과 중국 사이에 수교가 맺어졌고 남북한이 유엔이 동시 가입했으며 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91년 12월에 기본합의서에 서명해서 10개월을 잘 갔는데 1992년 9월 평양에서 제7차 총리회담이 열렸을 때 사건이 생겼다. 노태우 대통령은 대표단이 평양으로 출발할 때 어떻게든 회담을 성사시키라고 했는데 느닷없이 회담을 결렬시키라는 훈령이 서울로부터 날아온 것이다. 알고보니 안기부가 개입하여 훈령을 조작한 것이었다. 해당 사실을 보고받은 노태우 대통령은 ‘이것은 총살감’이라고까지 말했지만 결국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임기말 대통령의 허약한 리더십이 그동안 쌓았던 공든탑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팀스피릿 훈련 재개를 10월에 발표했다. 원래 팀스피릿 훈련은 12월말에 발표하곤 했다 그런데 그걸 앞당겨서 92년 10월에 발표한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그리하여 남북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고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 중심에 정보기관이 있었다. 주권자인 국민이 얼마나 분노할 일인가.
▶ 대북 정책은 호응을 얻은 반면, 이번 개성공단 사건을 다루는 데 통일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많이 주었다.
안쓰러운 일이다. 통일부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부조직법에서는 통일부의 존재 목적을 남북 대화 협상, 통일 문제에 대한 정책과 집행 등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지금 대북 정책은 그리 체계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개성공단이라는 중요한 현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부의 두뇌 기능은 정지했고 일부 팔다리로서의 기능만 하고 있다.
▶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군 출신이라는 사실도 북한에 대한 보다 강경한 대응을 가져온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다.
군인에게는 군인으로서의 임무가 있다. 그렇지만 군인적 사고만 가지고서 국정을, 대북정책을 운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대통령의 평화 비전과 철학이 관건이다.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에 대해 어떤 비전과 철학을 갖고 있는가? 나는 아직 박근혜 대통령에게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다.
박 대통령 ‘밥상론’은 9.19 공동선언과 맞닿아 있다
▶ 어떤 이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인가?
박 대통령이 야당 의원이던 2007년에 쓴 자서전을 읽어본 적이 있다. 북핵문제와 남북문제에 대해서도 각각 한 파트씩을 할애하고 있더라. ‘신뢰’를 이야기하면서, 툭 터놓고 이야기를 하면 북한도 지킬 것은 지키더라며 남북 대화의 유용성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또한 핵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밥상론’을 이야기했다.
북한의 핵문제를 한국식 밥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인데 서양과 동양의 다른 식문화를 예로 들면서 시작한다. 서양의 식탁에서는 수프가 나오고 샐러드가 나온 다음 주요리가 나오고 후식이 나오는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단계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북한의 핵문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식 밥상 모양으로 한 밥상에 밥, 국, 김치, 찌개 등등 다 차려서 포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계적 해법이 아닌 포괄적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 포괄적 해법을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그러한 해법이 제시된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이것에 가장 근접한 해법이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이다. 클린턴 정부 후반기에 국방부 장관이었던 페리가 대북정책조정관이 되어 대북 정책의 모델로 제시했던 것이다. 북한의 요구인 적대시 정책의 포기, 미국과의 관계 개선, 경제 지원들을 모두 올려놓고, 미국이 요구하는 미사일 문제나 핵 문제에 대한 조치들도 모두 올려놓고 교환하는 것이다.
2005년 9월 19일, 북한은 핵을 포기하기로 했고, 미국은 북한과 수교하기로 하였으며, 정전체제는 평화체제로 바꾸고, 북한에 경제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포괄적 해법의 결정체가 바로 9.19 공동성명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는 5년 동안 9.19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선 비핵화만을 주장했다. 북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북과 대좌하지도 못했다. 그저 비핵 개방 3000이라는 몽상 같은 이야기만 주문 외우듯 반복했다. 그 결과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북핵은 고도화를 향해 질주했다. 아직까지 박근혜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 대해서 한미 공조를 강조하는 것 외에 이렇다할 언급을 한 적이 없다. 지금도 밥상론 개념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유효하다면 택하여야 할 해법은 바로 9.19 공동성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 ‘밥상’식으로 해결한 모델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9.19 공동성명도 남북기본합의서와 마찬가지로 그 수명이 길지는 못하였다. 9.19 공동성명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핵심은 미국 강경파이다. 미국 강경파는 북한 핵문제는 곧 북한 정권 문제이기 때문에 정권 교체가 되어야만 해결된다고 본다. 교체 대상과의 협상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이들은 북한과 협상하는 것을 혐오했다. 9.19 공동성명은 북한과 협상해서 나온 산물이었고, 부시 정부의 강경파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북한이 합의 내용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사실관계는 그와 다르다. 역사적 사실은 네오콘들이 협상을 혐오했고 대북 협상의 산물인 9.19 공동성명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9.19 공동성명은 2년 뒤인 2007년에 다시 살아난다. 9.19 공동성명이 파기된 후에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이라크전은 수렁에 빠지고 공화당이 소수당으로 전락하게되자 부시 대통령이 네오콘들을 퇴진시킨다. 럼스펠드, 월포위츠, 볼튼도 빠졌고,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대북 문제를 맡긴다. 이러한 전환이 2007년 2.13 합의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2.13 합의는 기본적으로 9.19를 실천하자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이것이 계속 동결되었다.
평화협정에 대한 통일부와 외교부의 시각차
▶ 라이스 국무장관이 대북 문제를 맡으면서 부시 정부가 기존에 갖고 있던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이 바뀌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평화협정에 대해 외교부와 통일부 간에 이견이 있어 당시 외교부 장관이었던 반기문 장관과 충돌이 있었다던 기록(김종대 본지 편집장의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이 있다.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기는 하다. 어쨌든 이는 개인으로서의 반기문과 정동영의 문제가 아니라 대북정책에 대한 통일부와 외교부의 시각차이에 따른 것이다. 통일부는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에 대해서 능동적인 반면 외교부는 수동적이다. 외교부는 또한 한미동맹의 입장을 지나치게 고려하는 측면이 강하다. 통일부는 한미동맹도 중요한 축이지만 남북간의 소통 또한 기본적인 축으로 보는 그런 차이가 있다.
외교부는 기본적으로 평화협정 문제를 북한의 전술이라고 인식하는 편이다. 북한이 말하는 ‘평화’는 외국군이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이는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전술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60~70년대의 냉전적 시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한반도에서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딱 하나, 분단 뿐이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북과 미국이 적대하는 냉전 구조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남한과 중국/소련도 적대했었지만 이는 해체되었다. 그래서 절반만 해체된 반냉전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평화체제와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한 북한의 입장도 변화를 겪었다. 과거 90년대 이전에는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선결 과제로 제시했었다. 또한 평화협정도 남한은 작전지휘권이 없는 괴뢰이므로 북한과 미국이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변했다. 92년 초, 김용순 대남 담당비서가 미국에서 켄터 차관을 만나서 북한과 미국이 수교하는 조건으로 주한미군의 주둔을 용인한다는 김일성의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2000년에 올브라이트가 평양에 갔을 때에도, 2000년 6.15 정상회담 때도 북한은 통일 이후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으로 볼 때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북중관계는 이미 92년에 큰 타격 입었다
▶ 일반적으로는 중국과 북한이 여전히 혈맹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언론에서 말한다. 그나마 최근에서야 중국이 유엔 안보리 제재에 참여하면서 기존의 혈맹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는 보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번 공개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보면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2005년의 9.19 공동성명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의 주변국들도 함께 평화체제 논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2년 뒤인 2007년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에서는 “3자 또는 4자”가 모여 한국전쟁의 종전 선언을 추진하자고 말했다. 이에 서울 주재 중국 대사였던 닝푸쿠이가 ‘중국은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에서 절대 배제될 수 없다’며 반발했다. 그런데 여기서 흔히 언급되는 4자가 아닌 3자를 언급한 측이 어느 쪽이었을까? 북한의 요구였다. 여기에 중국이 낄 일이 아니라는 것이 북한의 입장이었다.
사실 북중 관계는 92년의 한중 수교에 큰 타격을 입는다. 92년 7월 15일,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이 묘향산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서 남한과의 수교 결정을 통보한다. 충격을 받은 김일성은 중국은 중국의 길을 갈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것이다, 라고 짧게 대답한다. 배신감이 컸다. 김일성은 중국이 남한과 수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전부터 수교를 2~3년 정도 늦춰달라고 간청해왔다. 그 동안에 북미 수교를 맺어 교차 승인을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동맹국이었던 중국이 이를 매정하게 뿌리친 것이다. 그때부터 북중 간에 혈맹으로서의 신뢰는 깨졌다.
소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90년 9월,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평양에 도착했다. 그 전에 노태우-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이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이유로 온 것인지 아는 김일성은 그를 만나지 않는다. 대신 김영남이 셰바르드나제를 만나 소련이 남한과 수교할 것임을 통보받는다. 이후 소련은 북소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이것은 우리나라로 치면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파기하고 북한과 수교를 하겠다고 통보한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남한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핵우산을 제공받는다. 북한도 북소동맹에 의해 소련의 핵 보호를 받고 있었다. 소련이 동맹을 파기하고 중국 또한 남한과 수교를 하게 되니 이때부터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개발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 그러고 보면 노태우 정부 시기에 중국 및 소련과의 수교를 성사시키는 등 외교적인 성과가 컸다. 가장 진취적으로 북방외교를 추진했던 사례이지 않은가.
노태우 시기의 북방외교가 한중/한소수교를 성공시키는 등 업적이 많기는 하다. 하지만 동시에 북미/북일수교를 맺어 교차 승인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당시에는 북한이 눈치챌까봐 비밀외교로 추진했던 일들이다. 이제는 대미/대일 무역 비중을 다 합쳐도 한중 무역에 미치지 못할 정도이니 매우 큰 국익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북핵문제가 더욱 불거지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탈냉전화가 진행되면서 한반도에서도 온전한 탈냉전을 이루었어야 했는데 우리는 절반의 탈냉전 밖에 이루지 못했다. 거기에 위협을 느낀 북한이 매달린 것이 핵무기 개발이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를 해결 못하고 있다. 답은 당연히 한반도의 냉전 해체이다. 평화체제의 핵심은 남북간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고, 북미간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것- 이것 없이는 북핵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한중/한소 수교로 동맹 잃은 북한, 핵무기로 생존 몸부림
▶ 북한의 최근 행태에 숨어있는 의도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모든 유기체의 가장 큰 본능은 생존 본능이다. 그리고 특히 역경에 처해 있을수록 더욱 그렇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고립무원한 국가이다. 북한에게 6.25 이후 최대 위기는 자신들의 동맹이 해체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20년의 북핵 위기는 바로 북한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생존을 위해 북한은 먼저 로켓 발사와 핵실험을 감행했다. 체제의 생존을 위해서는 핵을 고도화하는 데 성공해야 했다. 그러나 생존이 핵무기만 가지고는 될 수가 없다. 김정은은 ‘인민의 허리띠를 더이상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하나는 핵을 통해서 외부에서 자신을 침략하지 못하겠다고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민의 먹을거리를 챙기기 위해 경제발전을 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올해 초 노동신문의 1면을 통해 핵과 경공업의 병진 전략을 공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충돌한다는 문제가 있다. 공업 발전을 위해서는 바깥으로 나와야 하는데 핵을 가지고는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이다. 이는 비단 북한에게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북한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 대한 우리의 해법은 핵에 대해서는 9.19 평화체제로 해결하고,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개성공단을 계속 하자는 것이다. 북한의 당면 과제인 생존을 위한 두 가지 수단인 핵과 경제발전에 대해서 우리도 두 개의 열쇠를 제시하자는 것이다. 서로 충돌되는 두 개의 생존 수단에 우리가 해법을 줄 수 있다.
▶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 대화를 해본 소수 중 하나이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인상은 어떠했었나?
한마디로 ‘협상이 가능한 대화상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주고 받기가 가능한 협상 상대라는 것이다. 이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김정일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올브라이트, 임동원 전 국정원장, 김대중 전 대통령도 한 말이다. 그는 대화 자리에서 굉장히 판단이 빨랐고 때문에 북한을 완전하게 장악, 통수하고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참모들이 안 된다고 말해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승인했다. 물론 그러니까 독재자이겠지만 (웃음).
김정일은 나름대로 국제정세와 한반도 정세에 정통하며, 북한에 대한 장악력을 갖고 있는 지도자였다. 또한 굉장히 유머와 위트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난 후 인상을 긍정적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북한의 지도자와 이미 만나본 경험은 박 대통령에게 매우 중요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대화와 협상은 여전히 가장 좋은 해법
▶ 북한 문제에 대한 가장 좋은 해법은 역시 대화라는 것인가?
적대적 관계에 있을 때 머릿 속으로 상대를 상상하기만 하면 상대가 괴물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적대적인 관계라도 만나서 대화를 하면 ‘느낌’이 생긴다. 그리고 그 느낌을 바탕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길 수 있다. 나는 박 대통령이 그런 자신감을 가졌으리라 생각한다. 대화를 해보았으니까.
국제사회가 모두 북핵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북핵문제는 기본적으로 북미 문제이며 또한 국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북미 문제로서의 북핵 문제와 교류협력으로서의 남북 문제가 상호 직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유일체제로 모든 정책 결정 권한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이고 신속한 협상 및 소통 수단은 최고통치자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북한측 <조선신보>의 논평이 있다. 2010년 9월 19일, 9.19 공동성명 5주년을 기념한 논평에서 조선신보는 2000년 10월 13일의 북미 공동코뮈니케를 언급한다. 북한의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에서 군복을 입고 클린턴을 만난 후 올브라이트와 함께 발표했던 것으로 북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서이다. 6.25 이후에 생긴 북미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를 정상화하며 미사일(당시에는 핵 문제가 부각되지 않았다)에 대해서는 모라토리엄(발사 유예)을 하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조선신보는 이것이 당시 4개월 전에 있었던 6.15 정상회담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또한 2005년 9.19 공동성명은 그 석 달 전인 2005년 6월 17일, 남한의 통일부 장관이 북한 지도자와 소통한 결과라고 말한다.
핵문제를 해결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며, 냉전 체제를 해소하려면 역시 북쪽의 최고지도자를 직접 상대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손을 잡고 6.15 시대를 열었고, 5년 뒤에 내가 김정일 위원장을 다섯 시간 면담한 다음 ‘제2의 6.15시대’가 열렸다고 조선신보가 평했다. 2005년, 말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들이 뒤따랐다. 구체적으로는 8월부터 북한 선박의 제주 해협 통항을 허가했고, 북한은 광복절에 대표단을 보내서 동작동 국립묘지에 헌화 참배를 하기도 했다. 이는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한반도의 비극은 언제나 중대고비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것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문제, 다시 말해 바깥으로는 핵문제와 안으로는 남북간 화해협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속히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1위원장과 만나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져야 한다. 3차 정상회담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한반도 문제를 한반도화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 지도자의 발언권 및 주도권 확보이다.
한반도의 비극은 한반도 문제가 중요한 고비에 이르렀을 때 항상 국제화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6.25도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도움으로 발생한 것 아닌가. 38선 또한 미국과 소련이 그은 것이다. 언제나 한반도 문제는 중요할 때 국제화가 되어, 우리가 스스로 목소리조차 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백년 전의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도 마찬가지다. 강대국들이 조선의 땅과 바다에서 각축전을 벌였다.
북핵 문제에서 북미관계가 핵심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우리가 영향력과 발언권을 행사해야 한다. 한반도 문제는 기본적으로 남과 북이 결정한다. 그것이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의 의미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지도자에게 발언권과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그 방법은 북한 지도자와 3차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물 밑에서 이를 준비해야 한다.
▶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과의 접촉은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만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다. 그리하면 아무래도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질 것 같다. 장관으로 재직하던 때에는 어떠했나?
내가 있을 때는 기본적으로 비공식 채널이 필요 없었다. 시민사화, 학계, 예술계, 체육계, 정치인, 경제인 워낙 각계각층으로 채널이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6.25가 끝나고 2000년 6.15 정상회담 때까지의 50년 동안 남한에서 이북을 방문한 사람이 2,50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2005년 한 해에만 대한민국의 주민등록증을 소지한 사람 10만 명이 이북 땅을 밟았다. 이는 금강산 관광을 제외한 수치이다. 당시 나의 목표는 이를 백만 명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내가 통일부 장관이 되어서 취했던 정책 1번이 바로 북으로 가는 문턱을 없애는 것이었다. 지난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는 지금 우리 국민을 못 가게 하는 것을 하나의 기득권처럼 삼고 있다. 그러나 왜 우리가 막는가. 솔직히 말해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감을 가지고 민간 차원의 교류를 다 승인해줄 필요가 있다. 이전에는 금강산 관광을 가는 데에도 신원조회로 2주일이 걸렸고 이북 사람을 만나려면 미리 접촉 신고를 해야 했다. 신원조회는 폐지시켰고 접촉 신고도 사후 신고로 대체하게 했다. 내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방북을 허가했을 때 정부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기존 틀을 뛰어넘어야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 방북 허가에 대해서는 통일부 장관에게 권한과 책임이 있는 것이니,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겠다고 하고 내가 승인했다.
이미 체제 경쟁은 끝났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하나 주면 하나 받는 식의 기계적인 상호주의로 남북 관계를 볼 것이 아니라, 자신감을 가지고 한반도를 경영하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반도는 독일형 통일도, 베트남형 통일도 불가능
▶ 최근에 우리나라는 독일형 통일이나 베트남형 통일로 갈 수 없다고 쓴 것을 읽었다.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베트남형의 통일은 무력을 사용한 것인데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군인들이 보다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94년 5~6월 클린턴 정부에서 영변을 폭격하는 등의 전쟁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개전 3개월 내에 미군 5만 명, 한국군 50만 명, 한국의 민간인 1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남한의 산업시설 80%가 파괴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와 실행하지 못했다. 이는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독일과 같은 흡수통일도 불가능하다. 동독과 북한에는 세 가치 큰 차이가 있다. 첫째로 동독과 서독은 전쟁을 하지 않아 서로에 대한 증오가 없다. 그러나 남북한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했고 여전히 증오가 남아있다. 평화롭게 흡수통합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 것이다. 둘째로 동독 내에는 교회와 같은 시민사회의 존재가 있었다. 독일은 오래된 기독교 국가이다. 때문에 처음 촛불이 켜진 곳 또한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였다. 매주 교회에서 서로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공동체 문화가 있었다. 북한에는 그런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셋째로 동독과 서독은 정상회담 이후에 서로의 텔레비전 방송을 볼 수 있는 등 오랜 소통을 해왔다. 1970년의 정상회담 이후 1년에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왕래했다. 이 또한 북한과 매우 다른 조건이다.
우리에게는 한국형 통일 방안이 필요하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바로 개성공단이다. 남한은 이를 통해서 8만불 시대로 가는 것이고, 북한은 20년 내에 남한 생활 수준의 절반까지 따라잡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통일 비용이 따로 필요 없게 될 수 있다.
▶ 그렇지만 북한에 대한 유화적인 접근법은 항상 일부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독재 정권을 돕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는 냉전시대적인 것이다. 북한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괴물이라는 관점이고, 이는 북한 붕괴론과 흡수통일론에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입증된 사실이다. 무력에 의한 통일 방식은 불가능하고, 독일식의 흡수통일도 앞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불가능하다. 오바마 정부가 지금까지 펼쳐 왔던 ‘전략적 인내’는 북핵 고도화 질주라는 결과만 가져왔다.
결국 우리가 가야할 방향은 화해공존하고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이다. 협상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검증된 방안이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과 북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도 후보 시절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공동선언의 3대 합의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잠재성장률 0%,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 동력은 남북 교류에서 찾아야
▶ 마지막으로 정치인으로서 남북통일에 대해 갖고 있는 비전을 듣고 싶다. 이제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공유하지 않는 세대들도 많아진 상태이다. 과거 정부의 ‘통일세’ 논란처럼 통일은 어떤 국민들에게는 당연한 민족적 과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부담처럼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통일은 대체 왜 필요한 것인가?
나는 성장 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성장 없이는 복지국가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게 사실이다. 한 달 전쯤 나온 OECD 보고서를 보면 한국경제가 2031년쯤 잠재성장률이 0%까지 하락한다고 되어 있다. 지금도 3%대로 주저앉은 상태인데 18년 후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성장 엔진이 꺼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복지국가를 만드나.
그런데 골드만삭스에서 몇 년 전에 낸 보고서를 보면 한국이 독일과 일본을 제친다는 전망을 펼친다. 왜 이렇게 다른가. OECD 보고서는 남한 단독 경제를 이야기한 것이고 골드만삭스 보고서는 남북 경제통합 상태를 이야기한 것이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토지와 광물자원, 노동력을 결합하면 새로운 경쟁력이 생긴다. 2030년이 되면 북한의 1인당 GDP가 남쪽의 50% 수준에 이를 것이고, 2040년에는 남한의 경제력이 독일과 일본을 제친다고 한다. 압축적으로 이야기하면, 1인당 GDP 8만불 시대는 가능하다. 1인당 소득 8만불을 올리는 나라가 되면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다들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그 길이 바로 대륙으로 가는 길이고 북방경제인 것이다.
독일 통일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브란트 수상의 오른팔이자 그의 동방정책을 설계한 에곤 바르 박사가 있다. 내가 그를 만나서 개성공단 사진을 보여주며 이를 설명했더니 무릎을 치며 놀라운 상상력이라고 평했다. 독일에서 동방정책을 설계했을 때에도 동독의 영토에 서독의 공업단지를 조성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며, 이것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게 놀랍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은 단순한 산업단지 이상이다. 이것은 한국형 통일 방안이다. 개성공단을 주욱 따라가면 그 중간에 경제통일을 보게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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