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에서 외교안보 분야의 어휘를 이상하게 전용하는 사례가 한둘이 아닌데 ‘킬체인’도 그중 하나다.
무슨 전략표적타격이니 대북 선제타격 능력이니 하는 의미로들 쓰고 있는데 (위키백과 한국어판도 이러고 앉았다) 본래는 그저 어떤 군사적 위협을 식별하고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린 후, 조치를 취하는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 미국 군사 용어일 따름이다(위키백과 영어판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워낙 국내에서 이런 의미로 통용이 돼 왔고 미국도 대북 긴급군사계획의 명칭을 킬체인으로 정하기도 했던 터라 처음에 이 책을 추천 받았을 때는 대북 선제타격 계획에 관한 책인가 했다. (2020년 4월에 간행된 후 화제가 됐다고 하는데 그간 외교안보 분야에 격조했던 터라 뒤늦게 알게 됐다.)
하지만 표지가 보여주듯 이 책은 미래 하이테크 전쟁에 미국이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를 다룬 책이다. 그런데 왜 제목이 ‘킬체인’이란 말인가?
그동안 미국의 방산 획득사업이 크고 아름답고 그럴싸해보이는 ‘플랫폼’ 위주로 이뤄졌는데 이제는 위협의 식별, 판단, 조치로 이어지는 킬체인의 구성을 위주로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는 게 책 내용의 골자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항공모함이나 F-35 같은 ‘플랫폼’보다는 위협의 식별을 위한 센서(위성, 드론 등)와 신속한 판단을 돕기 위한 AI,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유기적으로,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하는 통신망의 확보가 더 중요해진다.
다시 말해 항공모함, F-22/35, JSTARS 같은 대형 플랫폼 대신 소형화, 무인화, 대량화 된 드론/센서/미사일들이 미래 군사작전의 주요 자산이 돼야 한다. 방산 행사에 VIP가 직접 타는 쇼를 보여줄 수 있는 자산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 존재도 보이지 않는 5G/6G 같은 네트워크가 주요 자산이 될 것이다.
대체 무엇이 달라졌길래? 앞으로 미국을 대적할 상대는 알카에다 같은 테러리스트 네트워크가 아닌 중국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분란전(COIN)은 결코 만만한 미션이 아니지만 미국이 과거에 전쟁을 수행하던 플랫폼을 대대적으로 바꿔야 할 만큼의 기술적 도전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마주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중국은 다르다. 어떤 영역에서는 이미 미국을 능가했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니까.
기술적으로 충분히 발달한 군사력이 이를 전략/전술적으로 잘 구사할 경우 어떤 상황을 볼 수 있느냐는 이미 러시아가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무력의 사용으로 유럽 대륙의 국경이 바뀐 사례”인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 점령에서 보여줬다.
당시 러시아가 구사한 전쟁을 하이브리드 전쟁이라고들 표현하는데 단순히 첨단기술+특수전 뿐만 아니라 역정보/심리전까지 능숙하게 사용해서 그렇다.
미국이나 유럽 다른 동맹국이 손쓸 틈도 없이 신속하게 점령한 후 상황을 기정사실화하고 첨단 군사력(전자전, 방공 미사일 등)으로 동맹국의 확전을 억제한다.
아직까지 중국이 자신의 새로운 전쟁 양식을 보여준 사례는 없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십중팔구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전쟁을 능가하는 역량을 보여줄 것이다.
아무래도 책은 미국의 현재 국방 전략을 비판하는 입장이다 보니 중국의 역량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전쟁은 기술력만 갖고 하는 게 아닌 정치, 경제, 사회가 총동원되는 작업이고 최근 일련의 사건들은 중국 경제가 갖고 있는 한계점도 어느 정도 드러냈다.
그러나 중국을 상대하게 될 때 미국의 현재 국방 전략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다. 왜냐면 중국의 전략은 미국을 겨냥해서 형성돼 왔기 때문이다. DF-21 같은 탄도미사일이 대표적이다. 미국의 군사력 투사력을 상징하는 게 항공모함인데 바로 이를 격침하는 걸 목표로 만든 (그 실제 효능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대항모 탄도미사일이기 때문이다.
탄도미사일 하나도 결코 싸진 않지만 항공모함과 항모전단을 꾸리는 비용에 비해서는 훨씬 저렴하다. 많은 것들이 집적된 소수의 대형 플랫폼은 이런 물량 공세를 당해낼 수 없다.
그런데 여전히 첨단기술 혁신의 본고장은 미국이 아니던가? DARPA와 스컹크웍스의 나라 미국이 왜 국방 기술 혁신에 어려움을 겪고 있나?
놀랍게도, 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방위산업은 이제 첨단기술 혁신에서 많이 멀어졌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이러한 이격이 어떻게 발생했는가다.
(이쯤에서 저자의 전문성을 의심하게 될 수 있다. 방산과 기술 문제는 매우 전문적인 영역인데다가 일반인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분야다. 결론적으로 저자만큼 여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자 크리스천 브로즈는 콜린 파월 당시 미 국무장관의 스피치라이터로 시작해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정책보좌관/스피치라이터, 존 맥케인 상원의원 보좌관, 미 상원 국방위원회 국장(staff director)을 지냈다. 9년간 매케인 의원을 도와 국방 문제를 다룬 것이 주요 경력이다.)
책의 3장은 미국 정부/군을 상징하는 워싱턴과 민간 기술기업을 상징하는 실리콘밸리가 어떻게 멀어지게 됐는지를 기술한다.
냉전 시대에는 정치지도자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지로 군사 기술이 첨단기술을 선도할 수 있었지만 냉전이 끝난 이후에는 방산 획득제도가 관료화됐고 (저자는 로버트 맥나마라를 그 원흉(?)으로 지적한다) 이후 방산 기업들은 저조한 수익과 오락가락하는 정책에서 헤매게 됐다.
자연스레 대박이 나는 유니콘 스타트업들은 대부분 방산과 상관없는 민간 분야에서 나오게 됐고 아예 국방부와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세대가 실리콘밸리의 주류가 되면서 워싱턴과 실리콘밸리의 이격은 고착됐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민간과 방산의 기술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책에 따르면 미국의 5대 AI기업 아마존, 알파벳(구글), 페이스북, MS, 애플의 2018년 R&D 비용은 도합 705억 달러인 반면 미국 5대 방산 기업 록히드마틴, 보잉, 레이시언, 제너럴다이내믹스, 노스럽그루먼의 같은해 R&D 비용은 62억원에 불과하다.
반면 중국은 공산당의 강력한 영도 아래 ‘민군융합’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고 아직 실전에서 평가된 사례는 없지만 그 수준이 상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이제 중국의 군사적 주도권 획득을 막는 게 미국 국방 전략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하고 다른 목표들은 모두 제쳐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엔 북핵에 대한 선제공격도 포함된다.
중국과의 경쟁을 위해서는 전략적 자원을 더는 낭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란과의 전쟁, 베네수엘라에 대한 개입, 북핵에 대한 선제공격 같이 “비용도 많이 들고 불필요한 임무”는 피해야 한다.
일례로, 트럼프가 오바마 시절에 이뤄진 이란과의 핵 합의를 파기한 게 나쁜 결적이었던 까닭은 그 합의가 좋은 합의였기 때문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부차적인” 문제에 한정된 군사력을 투입하는 걸 막았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전통적인 공화당 노선에 가깝다고 여길 수 있는데 이런 언명은 꽤 놀랍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얼핏 유사하게 들릴지 몰라도 리버태리언적 불개입주의와는 확연히 노선이 다르다.
이제 미국은 냉전 이후의 황금기(?)처럼 타국 대비 압도적인 군사 우위를 누리기 어려워졌다. 그만큼 군사적 자원이 한정됐고 이제는 이를 최대한 경제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저자는 그걸 중국을 차단하는 데 올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뿐이다.
저자는 워싱턴 정가를 떠나 이제 방산 테크기업의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일하고 있다. 이제는 미국의 국방 정책 등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고 1년 4개월이 지난 2021년 8월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군했다. (존 그레이는 최근 기고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이 뒤늦게 현실주의로 회귀하고 있다고 말한다.)
미래 하이테크 전쟁에 대비하여 국방 획득체계를 재편하는 데에 장애물은 산적해있다. 지역 유권자의 입장을 헤아려야 하는 의회 제도도 펜타곤의 관료제 못지 않은 장애물이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건너뛰어야 하는가?
새로운 기술로 군사혁신(RMA)를 이룩하는 데는 많은 희생이 뒤따른다. 단적으로 공군의 유인기 조종사들이 기체 무인화를 반길 까닭은 하나도 없다. 유인기를 생산하던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들은 어떻겠는가?
하지만 저자는 현재의 제도 안에서도 충분히 혁신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숱한 이해관계자 사이의 인센티브 구조를 이해하고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면 된다는 것이다.
미 해군의 항공모함 USS 해리 트루먼 퇴역 시도 사례와 미 공군의 JSTARS 구매 예산 감축 시도 사례는 좋은 비교가 된다. 해군은 2019년 해리 트루먼호를 퇴역시키려 했다가 관련 업종이 많이 분포한 지역구의 의원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받고 계획을 철회했다.
반면 공군은 2018년 중국이나 러시아의방공망에 취약한 JSTARS 구입을 줄이고 무인기와 위성의 네트워크를 확보하려던 계획을, 관련 기업들에겐 새로운 사업 계획이 기업들에게 줄 수 있는 이익에 대해 설명하고 관련 지역구 의원들에게는 새로운 사업이 JSTARS를 생산하던 지역에서 생산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득하는 등으로 가까스로 성공시킬 수 있었다.
획득제도의 개편은 불가피하다. 플랫폼 위주의 사업 공고 대신 임무 위주로, 해결이 필요한 작전적인 문제를 분명하게 명기하여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업자에게 많은 예산을 부여하는 방안을 저자는 제안한다. 그리고 방산 기업이나 민간 기술기업은 물론이고 각군, 정부 연구소 등등 모두에게 이를 개방하여 서로 경쟁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간 IT 분야에서는 스타트업이 유니콘으로 성장한 사례가 많은 반면 방산에서는 이런 사례가 거의 전무하다. 그나마 손에 꼽을 수 있는 게 스페이스X와 팔란티어 뿐이다. 방산에서도 유니콘이 되는 스타트업이 더 많이 나올 수 있어야 민간의 혁신적인 기술이 성공적으로 방산에 유입이 된다는 것. 하지만 방산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에 이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총평
예전에 내가 번역했던 ‘궁극의 군대‘는 미군이 기술을 어떻게 확보하고 활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저작이었다. 이 책은 현재 미군이 첨단기술 확보에 얼마나 실패했는지(특히 이 부분이 많은 사람들에겐 놀라울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변해야하는지를 역설하고 있어서 두 책을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나는 커리어를 외교안보와 방산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특히 저자가 주장하는 방산 획득제도 개선안이 한국의 방산에 시사하는 점을 관심깊게 읽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향후의 한국 외교안보 정책이 어떤 형태를 가져야 할까에 대해서도 줄곧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로 더는 미국의 확장억제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워진 상황, 중국의 계속되는 팽창주의적 행보, 미국의 현실주의 회귀 등은 한국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지만 한편으로, 과거에는 역내 제일의 플래쉬포인트가 한반도였지만 이제는 그게 대만이 되고 있어서 조금은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나 생각도 든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강제 병합한 것처럼 중국이 대만을 나름의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강제 병합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TSMC가 공산당 손에 들어가면 앞으로 정말 볼만할 게다.)
이런 사안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중에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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