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핑턴 포스트의 성공과 그 역사

[note note_color=”#ececec”]이글루스 블로그에 2012년 5월에 썼던 글입니다.[/note]

허핑턴 포스트The Huffington Post는 우리에게 그리 잘 알려진 언론매체가 아니다. 2008년부터 미국 언론사 웹사이트들 중 최고 수준의 트래픽을 자랑하게 되었고, 2011년에는 우리나라돈으로 3800억 원에 달하는 가격(게다가 대부분 현금)으로 AOL에 인수되었으며, 올해는 온라인 언론으로는 최초로 퓰리처 상을 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허핑턴 포스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처음에 내가 허핑턴 포스트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국내 언론에서는 그 성공 비결을 블로거들이 직접 기사를 써서 제공하는 방식에서 찾았다. 당연히 나는 ‘그럼 왜 오마이뉴스는?’이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SNS도, 블로거들이 만드는 뉴스도 죄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의 사례를 보유하고 있지 않던가. 단지 나라와 그 문화적, 경제적 역량의 차이만으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Columbia Journalism Review에서 허핑턴 포스트의 역사와 그 배경에 대한 상세한 커버스토리를 실은 것을 읽게 되었다. 지난번에 요약, 소개한 예프게니 모로조프의 스티브 잡스 비평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분량이라 바쁜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부담스럽다. 그래서 안 바쁜 내가 또 내용을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10포인트 글자로 인쇄해도 A4 23장 분량인 글을 요약하는 데에 있어, 나의 관점이 없다면 제대로 요약(또는 왜곡)이 될 리 만무하다. 내가 이 길고 긴 기사를 읽으면서 내 스스로에게 묻고 있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 허핑턴 포스트는 누가 만들었고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 정말로 아리아나 허핑턴이 허핑턴 포스트의 모든 것이었나?
  • 허핑턴 포스트의 성공 요인에는 무엇이 있었나?

심지어 아래의 요약까지 보기 힘든 정말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을 먼저 보여주자면 다음과 같다:

  • 아리아나 허핑턴의 인맥은 강력한 무기였지만 허핑턴 포스트를 트래픽 진공청소기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조나 페레티이다. 페레티는 현재 viral 컨텐트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BuzzFeed를 만들어 또다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허핑턴 포스트의 성공에 대한 분석에서 모두가 간과하고 있던 인물이다.
  • 철저한 SEO, 아리아나의 인맥, viral에 대한 집요한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디어가 생기면 회의를 하는 대신 곧바로 시도하는 저돌성과 끈기가 허핑턴 포스트의 성공 요인이었다.
  • 무엇보다도 허핑턴 포스트는 이 disruption의 시대에 어떻게 작은 점들을 연결하여 커다란 네트워크로 만드는가에 대한 훌륭한 성공 사례를 제공한다. 정치 조직이든 기업 조직이든, 작지만 응집력이 강한 조직이 어떻게 광범위하고 오래 지속되는 조직으로 탈바꿈 하였는가를 볼 수 있다.

2011년 2월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AOL의 인수 이전까지 허핑턴 포스트는 많은 이익을 내고 있던 기업도 아니었다. 겨우 2010년 즈음부터 수익을 내기 시작했고 그 액수는 3천만 달러(지금까지 이 액수는 공개된 적이 없었다고)에 불과했다. 전통적으로 언론계에서 주목을 받으려면 필수적이었던 ‘특종’도 별로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독자적인 컨텐트가 많았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치와 비즈니스 분야에서는 그런 컨텐트가 많았지만 사이트 전체의 컨텐트 중 대부분은 다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바로 이러한 이유로 허핑턴 포스트를 폄하한 언론이 많았지만, 사실 이는 많은 신문사들도 마찬가지이다.

허핑턴 포스트는 SEO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었고, 소셜 미디어의 부상을 이해하고 거기에 승부를 걸 줄 알았다. 그리고 아리아나 허핑턴의, 1만 9천 명에 달하는 인맥이 합쳐지자 언론의 역사에 놀라운 일획이 그어졌다.


 

68개의 섹션, 월간 12억의 페이지뷰, 작년 한 해에만 5천 4백만 개의 코멘트가 이 언론사 웹페이지에 달렸다. 미국의 거의 모든 기성 언론들의 웹 트래픽을 능가하는 허핑턴 포스트의 시작은 2003년 3월의 한 점심식사에서 비롯되었다.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을 놓은 케네스 레러Kenneth Lerer는 AOL의 커뮤니케이션 부사장직을 마지막으로 은퇴, 뉴욕과 유타를 오가며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한 젊은 사회학자 던컨 와츠Duncan Watts의 책 <Six Degrees>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와츠를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와츠는 산타페 연구소의 연구원과 컬럼비아대 사회학 교수를 거친, 네트워크 이론의 전문가였다.

레러는 와츠에게 자신이 미국총기협회(NRA)를 잡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총기협회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로비 조직 중의 하나이다. 그런 강력한 조직을 상대하려면 우리쪽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그게 가능할 것인가? 레러는 와츠의 책에 그 답이 숨어있다고 믿었다.

와츠의 <Six Degrees>는 네트워크 이론에 관한 책이다. 우리에게 ‘케빈 베이컨 게임’ 등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여섯 다리를 건너면 세계의 누구와도 연결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단 여섯 다리만 건너면 세계의 그 누구와도 연결이 가능한데 왜 우린 그런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야구장에서 한참 경기가 진행 중인 6이닝 때, 한 사람이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동참하더니 어느 순간 야구장의 관객 모두가 같은 박자에 맞추어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처음에 박수를 쳤던 그 사람이 느꼈을 희열은 어떨까? 네트워크는 그만큼 경이로운 현상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재현하기가 불가능한 현상이기도 하다. 똑같은 사람이 다시 한번 그 희열을 맛보기 위해 7이닝 때에도 박수를 쳐보았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이 호응을 해주지 않았다. 6이닝 때와 똑같은 조건을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수많은 변수들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도를 해볼 수는 있다. 박수를 쳐보고, 그 결과를 관찰한 다음, 거기에 맞추어 그 다음 행보를 결정하는 것이다. 구호를 넣어본다거나 율동을 곁들인다거나. 변수를 조정해 가면서, 모든 과학자들이 수용하는 가능성인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와츠는 레러에게 조나 페레티Jonah Peretti를 소개한다. 페레티는 당시 29세로 MIT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교사들끼리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크 구축 방법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건을 겪으면서 그의 관심사가 크게 바뀌게 되었다.

조나 페레티. 허핑턴 포스트에서 가장 중요했던 인물이자, 앞으로도 계속 주시해야 할 인물
조나 페레티. 허핑턴 포스트에서 가장 중요했던 인물이자, 앞으로도 계속 주시해야 할 인물

2000년 당시 나이키에서는 소비자가 개인적으로 원하는 문구를 새긴 옷을 파는 이벤트를 실시하고 있었다. 장난기 넘치는 페레티는 나이키에 ‘SWEATSHOP(저임금 노동착취의 현장을 뜻하는 단어)’이라고 쓴 스니커즈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고, 당연히 나이키에서는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다. 페레티는 이메일을 보내 왜 안 되느냐며 나이키 담당자와 설전을 벌였고, 그는 이 이메일들을 하퍼스Harper’s에 보내 기사화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잡지에서는 이를 거절했다.

페레티는 자신의 친구 10명에게 이 이메일을 보냈는데, 그 친구들이 또다른 친구들에게 메일을 전송하면서 확산되었고, 불과 2주 만에 한 지역 신문에 그 내용이 소개되었다. 곧이어 살롱Salon과 타임, 가디언까지 이를 다루었고 결국 페레티는 TV쇼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페레티는 오늘날 말하는 바이럴 컨텐트에 대해 집요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이키 때와 같은 현상을 재현할 수 있을까? 그는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서 뉴욕으로 이주하여 바이럴 컨텐트 생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레러는 페레티와 함께 NRA를 저지하기 위한 Stop the NRA.com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애초에 의도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페레티에게는 큰 교훈을 주었다. 바이럴 meme의 확산에 있어서 (나이키 때와 마찬가지로) 메인스트림 미디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익혔다. Stop the NRA.com의 문제점은 이미 (와츠의 언어를 빌리자면) ‘클러스터’化된 청중들을 상대로 했다는 데에 있었다. ‘클러스터’란 이미 끈끈히 응집되어 있고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그 내부에서는 강고하지만 외부와는 단절되어 있어 확산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진보 정치 집단의 가장 큰 문제이지 않은가!) 이는 당시의 언론계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신문들은 자신들이 발행되는 지역의 거주자들만 상대했다. 유통구역이라는 지역적 제약을 넘으려는 시도는 이단 취급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런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어떻게 찾아내서 활용할 수 있단 말인가? 서로 연결점을 찾을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던 컨텐트를 연결하여 전파하는 것이 특기였던 페레티는 자신이 그 답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바로 ‘지루한 직장인’의 네트워크(Bored At Work Network)였다. 일하다 지루해진 사람들은 뭔가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흥미로운 것을 찾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컨텐트가 필요했다. 그것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해야 한다.

포워딩 되는 컨텐트는 그것을 포워딩 하는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포르노를 포워딩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포르노를 포워딩하는 사람은 전혀 멋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절한 컨텐트만 있다면 이 지루한 직장인 네트워크를 통해 약한 링크weak link들을 강한 링크strong link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거대한 네트워크가 태어나는 것이다. 페레티는 그것에 대해 나중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재현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레러는 Stop the NRA.com이 끝나고 나서 페레티에게 로스엔젤레스로 가서 아리아나 허핑턴Arianna Huffington을 만나볼 것을 권했다. 그리스의 신문사 소유주의 딸인 아리아나 스타시노풀로스Stassinopoulos는 아테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영국 캠브리지 유니온의 멤버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거기서 구축한 인맥으로 TV에도 출연하였고 나중에는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그녀는 텍사스 석유 재벌인 마이클 허핑턴과 결혼하였고 그녀의 도움으로 마이클은 공화당 하원의원이 될 수 있었다. 97년 이혼 후 그녀는 ‘진보’로 전향하여 주지사에 출마했지만 1%도 안 되는 득표로 씁쓸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그녀는 다시 책을 썼고, ‘아리아나온라인’이라는 블로그를 시작했다.

아리아나 허핑턴: 부하 직원들 다 일하는데 혼자 사진 찍는다고 개폼 잡는 악덕 고용주
아리아나 허핑턴: 부하 직원들 다 일하는데 혼자 사진 찍는다고 개폼 잡는 악덕 고용주

2004년 가을에 페레티와 아리아나가 처음 만났고, 페레티는 아리아나의 친화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줄곧 3개의 블랙베리 휴대폰에서 주의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말을 하나 하나 잘 들어주어,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페레티가 뉴욕에 돌아오고 나서, 레러는 셋이서 합작할 벤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우린 거대한 사이트를 만드려는 게 아닙니다. ‘영향력 있는’ 사이트를 만들 겁니다.”

2004년의 대선에서 조지 W. 부시는 수많은 실정에도 불구하고 존 케리를 꺾으며 재선에 성공한다. 아리아나의 초청으로 그녀의 집에 모인 좌파의 유명인사들은 제각각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를 논의했는데 (이로 인해 이후 (페이스북과 윙클보스 형제의 사례처럼)허핑턴 포스트가 사실은 자신의 아이디어였다는 주장과 함께 소송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매트 드러지Matt Drudge의 드러지 리포트(관련 링크1, 링크2)에 대한 대항마의 필요성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레러는 다양한 의견을 속에서도 하나의 공통점을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최근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블로그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페레티는 드러지를 따라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몇몇 사이트들이 그렇게 해서 약간의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드러지 리포트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 찾아오게 만드는 ‘끈끈함sticky’을 갖고 있진 못했다. 블로거들도 그러한 끈끈함을 갖고 있었다. 서로 생각을 공유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그러한 ‘클러스터’는 촘촘히 엮여있는 반면 천천히 형성되는 편이다.

그러나 페레티는 그러한 네트워크를 빨리 엮어내고 싶어했다. 이미 몇 가지 실험을 통해 페레티는 자신의 컨텐트를 매우 효과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만든 네트워크는 오래 지속되지를 못했다. 반면, 아리아나 허핑턴의 네트워크는 긴 시간동안 지속되었다.

페레티가 보기에 아리아나의 강점은 약한 링크를 강한 링크로 ‘만드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약한 링크를 강한 링크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페레티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당신과 가까운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모아 커다란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는 권력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페레티의 결론은 이랬다. 허핑턴 포스트는 바이럴함과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방문케 하는 끈끈함을 갖추어야 했다. 방문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연결됨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원한다. 블로그 열풍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에 유명인사들이 직접 블로그를 하는 것만한 게 또 어딨겠는가? 기존의 블로거 커뮤니티는 이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싫어하는 사람들조차도 매일 방문하겠죠.”

허핑턴 포스트가 2005년 5월 처음 오픈했을 때의 반응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특히 기성 저널리즘 종사자들의 평은 악평 일색이었다. “허핑턴 포스트 같은 블로그들의 문제는 우리의 관심을 진지하고 실질적인 저널리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아더 슐레진저 같은 저명한 진보 학자와 미국 TV 시트콤의 전설인 Seinfeld를 제작한 Larry David 같은 사람들이 오프닝으로 블로그 글을 쓰면서 허핑턴 포스트는 분명 많은 관심을 모았다. 무명의 블로거들도 그들과 같은 바이라인을 쓰면서 ‘대화’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포럼’을 제공하면서 허핑턴 포스트는 보다 넓으면서도 끈끈한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었다.

페레티는 이때쯤 자신의 사업 BuzzFeed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자신의 학생이기도 했던 폴 베리Paul Berry를 데려온다. 당시 그는 서른 살이었고 막 결혼한 상태였다. 이제 그가 허핑턴 포스트의 트래픽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베리와 페레티는 이 거대한 disruption 속에서 창조적인 플레이어가 되는 법을 익혔다. 이 ‘산만한’ 문화 속에서는 실패 또한 일의 즐거움의 일부였다. 그들은 허핑턴 포스트에서 이렇게 일했다. “월요일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에 대해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회의를 하는 대신 그냥 냅다 실행해 버립니다. 수요일쯤에는 그 아이디어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더 연구를 하지요. 그래서 금요일쯤 되면 이미 완전히 다른 형태로 실행이 되고 있거나 거의 실행 준비가 다 된 상태가 됩니다.”

허핑턴 포스트의 오늘을 만든 폴 베리
허핑턴 포스트의 오늘을 만든 폴 베리

그리고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트래픽을 기준으로 측정되었다.

허핑턴 포스트의 성공 비결에는 철저한 SEO도 있었다. 뉴욕에 있는 베리와 그의 스탭들이 한참을 구글 검색 알고리즘을 테스트하다가 날이 저물면, 이제 지구 반대편의 우크라이나나 남아메리카의 프로그래머와 코더들이 그 일을 넘겨 받았다. 그들은 24시간 멈추지 않고 구글 검색 결과에서 최상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연구했던 것이다.

페레티가 버즈피드에 더 집중하고, 허핑턴은 브렌트우드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며, 레러는 자신의 사업에 몰두하게 되면서 허핑턴 포스트의 뉴스룸을 책임지는 것은 베리가 되었다.

베리는 왜 헤드라인에 동사보다 명사를 써야 검색에 유리한지 등을 커다란 목소리로 내내 설명하곤 했다. 허핑턴 포스트 뉴스룸의 에토스는 오로지 구글 검색에서 1등을 하는 데에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컨텐트의 오리지널리티보단 그 확산이 중요한 것이었다. 이들의 트래픽 제일주의는 히스 레저가 2008년에 사망했을 때의 기사에서도 나타났다. 사람들이 히스 대신 발음이 비슷한 keith를 자주 사용하여 검색한다는 사실을 알아 내고서는 기사의 태그에 keith를 달아놓은 것이었다. 당연히 keith로 검색한 사람들은 모두 허핑턴 포스트의 기사를 먼저 읽게 되었다.

2008년의 대선이 끝나고 나면 허핑턴 포스트의 트래픽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페레티는 트래픽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절반 이상의 트래픽이 정치 외의 기사를 통해 나온다는 것을 확인했다. 곧바로 허프포에는 비즈니스, 엔터네인먼트, 그리고 아리아나의 관심사였던 건강과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섹션이 신설되었다. 그리고 그 해의 대선은 허핑턴 포스트에게 노다지가 되었다. 드러지 리포트의 두 배, 그리고 월스트리트 저널과 LA타임즈를 제치는 트래픽. 그해 11월, 허프포는 업게 선두의 트래픽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기성 언론의 눈초리는 여전했다. 허핑턴 포스트의 대부분의 기사가 다른 언론사의 기사의 내용을 요약종합(aggregate)해서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여 그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구글 뉴스는 단지 헤드라인과 첫 문단을 보여주는 정도였고, 드러지 리포트는 제목만 보여주고 신문사 홈페이지로 링크하는 정도였지만, 허핑턴 포스트는 원문 기사의 링크를 숨기지는 않으면서도 사용자들이 그걸 찾기 어렵게 만들었다. 최대한 자신의 사이트에 잡아두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2011년 2월, AOL은 3.15억 달러의 금액으로 허핑턴 포스트를 인수한다. AOL의 선택을 두고 말이 많았지만 사실 당시 추락하는 거인이었던 AOL은 컨텐트를 통한 트래픽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AOL의 인수 이후 허핑턴 포스트의 창립 멤버 셋 중 아리아나만 남게 된다. 켄 레러는 자신의 VC를 시작하고 페레티는 버즈피드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미 수년 전부터 뛰어난 기성 언론인들을 영입하여 자체 컨텐트도 조금씩 보완을 해나가고 있었다. 사실 이번에 허핑턴 포스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David Wood도 타임, LA타임즈 등을 거치고 2011년에 영입된 베테랑 종군기자였다.

2012년, 허핑턴 포스트는 외형적으로도 매우 거대해져, 비평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일부 팬들 조차도 규모의 너무 비대해진 것은 아닌가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비대해지면서 보다 날쌘 컨텐트 확산 벤처들에게 취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페레티의 버즈피드는 이미 월간 250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하며 급성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핑턴 포스트의 광고수익도 이전에 비해 떨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허핑턴 포스트에는 또다른 무기가 있었다. 바로 코멘트. 코멘트 또한 컨텐트였고,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었다. 이란의 2009년 대선에 관계된 폭력 사태에 대한 Nico Pitney의 글은 11,000개의 코멘트가 달리기까지 했었다. 부유층 인사들이 휴스턴에서 모여 오바마의 재선을 막기 위해 1억 달러를 모으려 한다는 Ryan Grim의 2012년 2월의 특종은 21,000건이라는 놀라운 숫자의 코멘트를 모았다.

코멘트에 대한 허핑턴 포스트의 관심은 대단했다. 스팸이나 불쾌한 코멘트들을 다는 심술쟁이(troll)들을 몰아내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는데 이는 기술을 통해 자동적으로 처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허핑턴 포스트는 2010년에 Adaptive Semantics라는 회사를 인수하는데 이 회사는 어떠한 컨텐트가 품고 있는 ‘감정’을 분석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이를 활용하여 불쾌한 코멘트들을 자동으로 필터링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 외의 작업은 직원들에게 맡겨졌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해에 허핑턴 포스트에서는 열심히 참여하는 사용자들에게도 권한을 주기로 하였다. 포스퀘어를 연상시키는 배지도 부여되었고, 몇몇 사용자들에게는 코멘트를 삭제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졌다. 배지를 받은 열성회원들은 AOL 같은 회사에게 있어 허핑턴 포스트가 얼마나 중요한 자원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페이지뷰만 늘려주고 단 한 번만 왔다가 사라지는 회원이 아니다. 코멘트는 그들이 얼마나 그 사이트에 헌신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딜 가나 덧없기 그지없는 웹의 세계에서, 이러한 회원들 이외에 광고주들이 비빌 수 있는 언덕이 어디 있겠는가?

허핑턴 포스트의 성공 사례는 복제, 재현이 가능한 것일까? 그러한 물음은 던컨 와츠를 괴롭히곤 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결국 일어나기 마련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바대로 이런 저런 일들이 절묘하게 맞물리는 일이 있는 것이다. 와츠는 허핑턴 포스트의 창립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도 그들이 성공할 줄 몰랐다.”

허핑턴 포스트의 성공에는 단지 어떠한 스킬이나 성격만이 있던 게 아니었다. 적절한 때도 있었다. 2004년의 블로그 열풍과 좌파의패배, 2008년 대선의 열기와 웹2.0의 도래, ‘지루한 직장인’ 네트워크의 출현과 기술의 발달. 무엇보다도 6이닝의 그 박수는 7이닝에 똑같이 반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와츠는 이렇게 덧붙였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결정론적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주요 종교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 창조주, 계획, 믿음, 운명, 인과율, 모두 결정론적이다. 저널리스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기 위해 일어난 것처럼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허핑턴 포스트는 드러지 리포트에 대한 좌파의 대답으로 여겨져 왔다. 최소한 지금껏 이야기의 프레임은 그렇게 짜여 있었다. 그들은 드러지에게서 빌렸고 블로거들에게서도 빌렸다. 그리고 Stop the NRA에서도 빌렸고, 아리아나온라인에서도 빌렸다.

그리고 허핑턴 포스트는 디지털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전통적인 저널리즘 세계에서는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했다. 그들은 반복했다. 실패의 가능성을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에 대해 전혀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그들은 실패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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