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면도법에 대한 예찬

키가 자라는 건 이미 한참 전에 멈추었는데. 수염은 그 이후에도 자라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대학 초년생 때만 하더라도 이틀에 한번 정도 깎아도 충분했던 것 같았는데 이제는 저녁이면 까칠해진다. 귀찮아서 수염을 길러보는 것도 생각해 봤다. 모두가 말렸다. 인생에는 모두가 말리더라도 감행해야 할 것들이 있지만, 스타일에 관련된 것들은 대체로 예외다.

무엇으로 깎을 것인가. 전기면도기는 급한 아침에 편리하긴 해도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카트리지 면도기는 전기면도기보다 낫긴 했지만 여전히 완벽하게 깎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카트리지가 너무 비싸다. 핸들과 카트리지가 같이 들어있는 세트를 산 다음, 나중에 카트리지만 추가하려고 가보면 남자들은 다 그 엄청난 가격에 경악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2~3년 정도만 지나면 내가 샀던 핸들의 카트리지는 대부분 단종되어 또다시 새로운 핸들을 사야한다. 면도기 코너만 들어서면 우리는 알렉스 존스Alex Jones 못지 않은 음모론자가 되어 거대 면도기 기업의 폭정에서 민중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잠시 가졌다가 자라나는 턱수염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결국 굴복하곤 한다.

조선 땅에 발 붙이고 살고 있는 남자에겐 시중에서 이 둘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레이저 시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기로 하자.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 구식 면도기를 사용한 습식 면도법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아마도 매우 불편하고 효과도 별로 없어서 21세기에는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전통적인 습식 면도법은 남아있었고, 게다가 요새 들어 인기라고 한다. 사라진 것은 그저 조선반도에 사는 내 눈에만 그랬던 것.

많은 리뷰들을 읽어보고는 Merkur의 슬랜트 양날 안전 면도기(39C)로 결정하여 주문, 받아서 사용하기를 대략 한 달. 면도의 새로운 세계를 알았다. 전기면도기나 카트리지 면도기는 단지 급할 때 빠르게 쓱삭쓱삭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장점이 없다는 걸 알았다. 여전히 가장 깔끔한 면도감을 줄 수 있는 것은 구식 면도기 뿐이었다.

전통적인 면도법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리뷰 등지에서 곧잘 하는 말이 있다. 면도를 하는 과정이 뭔가 명상에 가까운 경험이 되곤 한다는 것. 집에서 간지나게 전용 거울과 오소리털로 만든 솔로 거품을 치덕치덕 바르고 하는 게 아니라 체육관 샤워실에서 하는지라 삼매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시퍼런 면도날을 턱과 목에 가져가면서 어떻게 하면 베이지 않고 깔끔하게 면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그 기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뜨개질을 하는 이들이 종종 경험한다는 그런 기분도 비슷하지 않을까. 깨끗한 턱과 목은 쓰다듬을 때마다 보람되다.

처음에 피를 보는 것은 피하기 어렵지만, 시간과 관심만 기울이면 결코 유혈이 낭자할 일도 없다. 자신의 피부와 잘 맞는 날의 선택도 중요한 것 같은데 아마존 등지에서 각종 면도날들을 혼합해 놓은 샘플러를 팔고 있기 때문에 초심자는 이를 사서 이것저것 써보면 좋겠다. 아직 Feather와 Derby를 써보진 않았는데 Lord의 제품이 현재까지는 가장 나와 잘 맞았다. 질레트는 너무 거칠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고 (영국 출장 중에 다른 쉐이빙폼을 쓴 거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경제성은 또다른 장점. 카트리지 한 세트 살 가격으로 매일 면도날 바꿔가면서도 서너 달은 쓸 수 있다.

아래는 클래식 면도에 대한 10가지 질문과 답을 담은 유튜브 동영상. 이거 하나만 봐도 클래식 면도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알 수 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