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륭을 기리며

어떤 우연은, 시간과 공간이라느니 원인과 결과라느니 하는 사바세계의 성가신 관료제를 ‘의미’라는 이름의 전차로 단박에 돌파해 버린다. 융의 공시성synchronicity 같은 것이다. 물론 20세기의 끝자락에 태어나 21세기를 사는 나는 이것이 의미를 통해 무질서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찾으려고 하는 심약한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고 의심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정말 의미는 그렇게나 무의미한 것일까. 어쩌면, 적어도, 마법에 대한 비교적 근래의 (수정주의적?) 이론이 추구하듯, 의미를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의식적 노력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는 않을까.

남미를 한 달 가량 여행하고 돌아온 7월 중순쯤, 박상륭이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례식도 하지 말라, 나를 위해 울지도 슬퍼하지도 말라, 차라리 축하나 하라.” 사모님께서 전한 선생의 생전 당부였다.

처음 타계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7월초에 돌아가셨다는 언급만 있었다. 런던에 머물고 있는 지금, 내가 리마에 있을 적에 콜린 윌슨에 대해 써두었던 글을 이 블로그에 실을 생각으로 다시 읽고 있는데 선생의 타계 이후에 나온 기사들을 통해 선생이 7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공교롭게도 내가 그 글을 리마에서 끄적이고 있던 때도 7월 1일이었다. 나는 리마 최고의 스테이크하우스라는 곳에서 와규 스테이크를 씹으며 아르헨티나 말벡 한 병을 들이킨 후 나의 에어비앤비 숙소로 돌아와 갑자기 콜린 윌슨에 대해 쓰면서 박상륭과 윌슨의 소설관을 비교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간에(리마와 뱅쿠버는 2시간 차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것을 떠올리니 묘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뵈었던 것은 2002년께였다. 니체를 읽고 콜린 윌슨을 읽던 시기에 박상륭도 읽으면서 관심을 가졌다. 내가 속해 있던 동인에서 선생을 모시고 모임을 갖는다 하여 간 자리에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그 모임에서 선생을 뵈었다. 처음에는 선생의 한국 거처가 광화문에 있던 터라 그쪽에서 모였는데 나중에는 일산으로 거처를 옮기시면서 일산에서 뵈었다. 일산으로 옮기시고 나서 뵈었던 2011년이 마지막이었다. 그 사이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치고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웠다.

선생을 만난 사람들은 다들 자신과 선생의 인연을 특별하게 여긴다. 선생에 대한 경외감이 크기 때문이 첫째겠지만 그 못지않게 스스로에 대한 애착도 강하기 때문이다. 선생이 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었네 어쨌네, 찾아보면 참 말도 많지만 뭐 그런 말은 나도 할 게 적지 않다. 그냥 선생은 필부에게도 상냥했던 것이다.

선생을 마지막을 뵈었던 2011년이었던가, 선생은 나가르주나(용수보살)에 대한 비판을 쓰고 있다고 하셨다. 아마도 유고에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다 버리라고 하셨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유언을 다 곧이곧대로 집행했더라면 까뮈는 세상에 없던 사람이었을 게다)

나는 박상륭의 문학이 아직껏 제값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버나드 쇼 이후에 자이니즘을 가장 진지하게 평가한 문학인일 것이고 서구의 어느 작가보다도 영성의 문제에 깊이 천착한 작가일 테지만 아직도 한국의 문학계는 그냥 김현이 남긴 몇마디에 얽매여서 박상륭을 말할 따름이다.

아직도 남아있는 박상륭에 대한 개인숭배는 성가시기 짝이 없다. 언젠가는 선생이 정말로 무엇을 겨누었고 무엇을 놓쳤는지를 논하면서 그제서야 그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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